사설·칼럼

[데스크칼럼] 신돈과 이성계

주장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10.15 10:13

수정 2014.11.07 13:12


1371년 신돈의 역모사건이 터졌다. 재상 김속명의 집에 투서가 날아들었고 바로 공민왕에게 전달되었다. 이 조작된 역모프로젝트의 주인공은 신돈의 개혁드라이브정책을 밀어주고 부추겼던 공민왕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돈의 힘과 광적인 신돈 팬들의 지지가 부담이 됐으며 반(反)신돈세력의 반발을 미연에 방지해 왕권을 유지코자 했다는 추정이다.

고려말은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무신란 등으로 사병을 확보한 권문세족과 원나라에 줄을 대어 출세한 세력들이 방대한 사유지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농민들 땅을 갖은 핑계로 약탈해갔다.
땅을 잃은 농민들은 유랑민이 되거나 산도적이 되어 고향을 버렸다. 문제는 남아 있는 농민들이었다. 이때 세금을 거두는 방식은 지역할당제였는데 도망가버린 사람들의 몫을 남아 있는 사람들이 몽땅 떠맡아야 했다. 세금을 낼 방법이 없는 농민들은 권문세가의 노비가 되기를 자청하거나 절에 들어갔다. 노비가 되면 병역, 납세, 노역의 의무를 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들은 노구솥에 엿붙듯 찰싹 붙어 서로의 부패를 덮어주고 있어서 고름을 짜내는 게 어려웠다. 왕이 신돈을 앞세워 개혁의 칼자루를 휘두르자 권문세족들은 ‘어디 근본도 없는 땡중이…’ 하면서 비난했다.

그러나 신돈은 땅를 빼앗겨 노비가 된 농민들을 원상회복시켰다.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동창회나 씨족회가 되어 있는 좌주나 문상 같은 학벌주의도 타파했으며 군을 장악하기 위해 최영을 유배보내기도 했다.

성균관을 복구, 신진사대부들을 대거 등용시켰으나 이들은 오히려 신돈을 개혁대상으로 보고 반격을 가해왔다. 사찰의 폐해를 거론하였으며 미천한 중출신이라며 생채기를 냈다. 이것이 신돈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기존질서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신돈의 개혁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신돈은 스스로도 약점을 남겼다. 반야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 모니노(우왕)며 사치, 향락, 뇌물수수로 늘어난 재산이 그것이다.

이 시기 전주에서 동북면(함경도)으로 이주하여 일가를 이룬 이안사의 후손 이성계는 변방출신이라는 약점을 딛고 고려사회의 주류로 떠오른다. 여기에는 젊은 시절 교훈이 큰 작용을 했다. 원의 기황후가 고려를 치러 오자 최영 이성계 등이 참전하였는데 전략회의 때 이성계가 겁을 먹고 싸우려 들지 않는 장군들을 비난했다. 그러자 장군들이 그렇게 잘났으면 앞장서 싸워보라고 했다. 이윽고 전투가 벌어져 선봉에 선 이성계는 죽기 살기로 싸워 적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기존세력의 도움 없이는 한발짝도 나가지 못한다는 큰 교훈을 얻었다. 이후 그는 늘 근신하고 자세를 낮췄다.

이성계는 쿠데타로 권좌를 틀어쥐고서도 당대 최고의 지식인 이색 등에게 늘 머리를 조아리고 상석에 앉게 하는 등 처신에 조심했다. 그리고 종군하면서 공을 세운 퉁두란 등 무장과 회군의 막후 연출자 정도전, 남은, 윤소종 그리고 강직한 선비 출신 조준을 적재적소에 두고 두루 활용한다. 그러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내세우자 지지율이 급속도로 떨어진다. 이성계는 여기서 일대도박을 한다. 보수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땅을 국유화하여 농사짓는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하겠다는 과전법을 밀어붙였고 조세제도를 개선하여 보수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1391년 9월 토지대장들이 불살라지자 농민들은 환호하며 거리로 뛰쳐 나왔다. 자연히 이성계의 지지도가 다시 상승했다. 경제를 살리면 모든 게 잘 풀린다는 본보기다. 진보세력에게는 공신전 녹봉 등을 지급하여 정치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우왕과 창왕, 이색, 권근, 이숭인 등을 제거하자 지지율이 급락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민심이 자신을 버렸다”면서 재신임 쇼를 벌이기도 하지만 결국 정몽주까지 제거하고 새 역사를 연다.

이성계와 신돈은 이렇듯 같은 개혁을 하면서도 서로의 운명은 판이하게 달랐다. 신돈은 이상에 치우쳐 조급하게 일을 처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이성계는 모두를 아우르기 위해 시기를 기다렸다. 조선조 최고의 화가 신윤복은 ‘훨훨 날아도 더디 가는 길인데 어찌 남들과 맞춰 가리…” 하는 자만심과 실력만 믿고 도화서를 뛰쳐나왔으나 평생 유랑하며 서러운 인생을 마쳤다. 뛰어난 자질을 오만함 때문에 더 크고 넓은데 쓰지 못하였던 것이다.

국회가 행정부를 견제하고 언론이 여야와 정부를 견제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다. 그러나 이 나라 정부는 비판을 도저히 참지 못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했다. 다 잘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이성계나 신돈처럼 부동산 하나만 잡아도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우르며 기다려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노무현 대통령은 주사위를 던져 버렸다. 이제 루비콘강은 건너야 한다.
무시무시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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