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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와 마녀] 누가 누구에게 ‘요부’라 돌던지나


◎ 장석주·문학평론가

결국 소설은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흔히 좋은 소설은 이전에 없던 인간성을 제시하거나, 운명의 변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머금는다. 그러나, 한 인간의 발랄한 개성과 현존의 질감은 인간성, 또는 운명의 변전 그 자체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사회와의 대립과 불화를 통해 예각화하며 파열하고 섬광으로 드러난다.

‘성녀와 마녀’가 흥미를 끄는 것은 극단적인 인물의 대위법적인 구도를 통해 어긋나는 운명과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다양한 작중인물들은 그들의 사랑과 운명을 감싸고 있는 1960년대라는 한국 사회와 여러 형태의 원근법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 관계맺음은 곧 인간과 사회의 소통의 흔적이며, 그 인물 하나하나는 시대의 의미 있는 전언을 실어나르는 담지체이다.

‘성녀와 마녀’의 가장 흥미있는 초점 인물은 형숙이다. 형숙은 주변의 남자들을 유혹하고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마녀이다. 그런 형숙을 사랑하는 수영은 그들의 결합을 반대하는 아버지 안박사로부터 뜻밖의 형숙의 생모에 관한 얘기를 듣는다. 형숙의 생모인 국주에게 빠져 거의 폐인 지경에까지 갔던 안박사는 그 나쁜 기억에 진절머리를 친다. 그가 어미의 외모와 기질을 쏙 빼닮은 “형숙의 혈관을 흐르는 피는 분명 나쁜 피다.”라고 단정짓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안박사는 선과 악이 고정불변의 것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전근대적 인물형의 표상이다. 그 안박사의 기준에 따르면 형숙은 ‘무서운 탕녀, 요부’의 전형이고, 수영이 결혼하는 정숙한 하란은 성녀의 상징이다. 성녀와 마녀를 가르는 도덕적 기준은 당대 사회의 주류적 규범으로부터 온다. 마녀의 피를 타고났다는 형숙은 뒤집어보면 여성의 타고난 본성을 억압하고 가정의 울타리 안에 가둬 한 남자만을 섬기고 봉사하도록 강요하는 가부장제 봉건적 도덕의 벽에 부딪쳐 쓰러지는 희생물이다.

형숙은 기질적으로 예술가이며 자유혼을 가진 여자이다. 당장에 떠오르는 인물이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자유연애론을 펼쳤던 나혜석이다. 선각자였던 나혜석은 남성 중심의 폐쇄적 봉건사회에서 돌출한 마녀였는지도 모른다. 눈부신 재능을 타고난 나혜석의 말로는 어땠는가? 나혜석의 말로는 끝내 가정과 사회로부터 내침을 당하고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철저한 파멸이었다. 어쩌면 작가 박경리는 나혜석에게서 형숙이라는 인물의 영감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형숙은 옛질서와 도덕을 피동적으로 수납하기를 거부하고 거기에 맹렬하게 저항하는 새로운 질서와 도덕의 상징이다. 가부장제 가족의 테두리 속에 제 생을 가두어놓고 살기에는 너무 자유롭고 뜨거운 피를 가진 여자이다. 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며 그 자유의지에 따라 제 삶을 확장하고 모험에 내주며 피동적으로 선택되는 대신에 능동적으로 남자를 선택하는 현대적 인물형이다. 전근대적 유교의 지배 아래 놓인 1960년대 초반 한국 사회의 주류적인 도덕과 인습의 잣대로 보자면 일탈과 파격을 일삼는 마녀이며 요부이다. 반면에 하란은 기꺼이 한 남자를 섬기며 가정에 충실한 현모양처형 인물이다. 타자들이 만든 당위적 도덕 속에 제 삶을 맞추는 수동형의 인물이다. 당연히 구시대 도덕의 신봉자이자 수호자인 안박사가 선호하는 인물은 하란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부성적 기능을 통해 상징계적 질서 안에서 법과 도덕의 규준을 제시하는 권력자이다. 수영은 새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제 세대 나름의 규범과 도덕을 형성하는 데 실패한 인물이다. 바로 그 때문에 형숙을 사랑하면서도 파멸에 빠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고, 아버지의 명에 따라 결혼한 하란까지 불행에 빠뜨린다.

주체의 도덕을 세우지 못하고 전근대의 도덕체계를 안이하게 받아들이는 데 그친 1960년대 한국 사회의 불행과 비극이 형숙과 하란. 형숙에게 들린 수영과 하란의 주변을 겉도는 세준이라는 작중인물들이 균등하게 나눠 갖고 있는 것이다.
누가 성녀이고 누가 마녀인가. 우리는 저마다 핏속에 성녀와 마녀를 함께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새로운 질서와 도덕의 도래를 알면서도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해 ‘성녀와 마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한 남자를 통해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전근대와 근대의 충돌, 세대와 세대의 갈등, 옛도덕과 새도덕 사이에서 겪어내는 분열증과 혼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성녀와 마녀’는 파란과 격동의 역사 속에서 부침하는 다양한 인물형을 보여주는 ‘토지’에 앞서 나온 소설이다. 본격 문학과 대중문학의 사이에 위치해 있는 ‘성녀와 마녀’는 박경리의 거대한 인간탐구서라고 할 수 있는 ‘토지’의 출현을 예감하게 하는 하나의 징후이며 전조(前兆)로 읽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