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에서] ‘네 탓이오’ 증후군

이진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10.17 10:14

수정 2014.11.07 13:08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주 전격 제안한 ‘재신임 국민투표’를 둘러싸고 정치권뿐만 아니라 온나라가 혼란스럽다. 일반 국민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맞은 격’으로 한편으론 어리둥절해 하고 다른 한편으론 불안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더욱이 지난 13일 노대통령의 시정연설에 이어 14∼16일 사흘간 국회교섭단체인 한나라당, 민주당, 통합신당 등 3당 대표들이 차례로 국민들에게 ‘재신임’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석과 해법을 내놓았지만 국민들은 누구 말이 맞고 그른지 더욱 종잡을 수 없을 뿐이다.

특히 이들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을 불안케 하고 혼란스럽게 만든 ‘재신임 정국’의 원인을 놓고 서로 “네 탓이오”만 강변했다. 대통령은 정치권 탓만, 정치권은 대통령이나 상대당 탓만 했다.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비겁한 모습’이었다.


정국혼란과 국민불안을 초래한 잘못을 스스로 “내 탓입니다”라고 겸허하게 고백하고 “함께 책임지고 해결해 나가겠다”고 과감히 천명하지 못하는걸까.

민주당을 탈당해 통합신당의 원내대표로 활동중인 김근태 의원이 지난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내 탓이오’ 양심고백을 했다가 정치권으로부터 ‘한 이상주의자의 해프닝’으로 매도당하고 웃음거리가 된 것은 우리사회에 만연한 ‘자기반성 부재’를 단적으로 드러낸 일례였다.

재신임 정국의 빌미를 제공한 SK그룹의 대선비자금 사건도 매한가지다.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나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검찰의 칼날이 들어오는 데도 철저히 ‘오리발 내밀기’로 부인했다.

대통령과 정당대표의 연설에서 어느 누구도 진정한 시인이나 사과가 없었다. 상대편 비리만 들먹였을 뿐이었다.

불신은 또다른 불신을 낳는다고 했다. 어쩌면 재신임 정국의 혼란은 우리사회에 관행처럼 묵인돼 오던 ‘네 탓이오’ 증후군이 낳은 총체적 위기가 아닐는지.

정치가 국민 위에 군림해 부패와 술수를 은폐하는 ‘공공의 적’이 되어선 안된다. IMF환란 이후 경제계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투명경영을 시도하고 있는 마당에 정치권도 스스로 투명하고 떳떳한 ‘공공의 선’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서구에서 흔히 사회 지도층의 책임의식과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기 위해 언급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우리사회에서 백번, 천번 강조돼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오늘도 정치권은 서울 여의도에 모여 내년 총선을 겨냥한 정치개혁안을 만든다고 법석이다. 그러나 ‘대국민 자기반성’을 통해 국민의 용서를 먼저 받아야 한다.
그 다음에 가뿐한 마음으로 가을하늘처럼 푸르고 쾌청한 ‘새 정치’를 호소하는 것이 정치와 국민간에 멀어진 신뢰관계를 회복하는 진정한 개혁일 것이다.

/정경부 이진우 차장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