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개혁 5년] <9> 하나은행-합병신화의 주인공, “변해야 산다” 끝없는 변신

임대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10.20 10:15

수정 2014.11.07 13:05




1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100년 역사가 넘는 쟁쟁한 은행들을 제치고 국내 빅4은행중 하나로 우뚝선 하나은행. 세계 100대 은행 진입을 눈 앞에 두고 있는 하나은행의 출발은 그러나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71년 40여명의 직원들이 조흥은행 서울 남대문로 본점 11층을 빌려 영업을 시작한 한국투자금융이 바로 모태. 하나은행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수많은 투자금융사들과 운명을 달리하며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충청·보람·서울은행 인수 등 위기때마다 뭉치고 아우르는 하나은행만의 저돌적인 힘과 비상한 전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로 인수합병(M&A)을 통한 성장전략. 그러나 막후에는 아픔과 좌절도 적지 않았다.

이제 한국을 넘어 아시아의 금융 강자를 꿈꾸는 하나은행 성장역사 제1막은 90년 은행 전환 프로젝트로부터 시작된다.

◇성공신화의 초석, 은행 전환 프로젝트=90년 10월18일. 당시 재무부는 ‘금융기관의 합병 및 전환에 관한 법률안’을 전격 발표한다. 금융시장 개방으로 생사가 불투명한 투자금융사를 은행이나 증권사, 종합금융회사로 전환시킨다는 법안이었다.
국제화·개방화·자유화로 숨가쁘게 변화하는 금융환경은 금융산업의 전면 개편을 요구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규제금융의 사생아’ 투금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규제금융의 울타리안에서 편하게 영업을 해 오던 32개의 투금들이 자칫 하루아침에 차디찬 길거리로 내몰릴 처지가 된 것이다. 이런 시대적 요구는 한국투금에도 예외를 허용하지 않았다.

90년 12월11일. 한국투금 내에 ‘장기발전 준비계획팀’이 발족한다. 은행 전환 프로젝트를 담당할 실무팀으로 지금의 하나은행 ‘청사진’을 최초로 만들었던 곳이다. 이듬해 1월7일. 한국투금은 은행전환 계획서를 재무부에 제출하고 나흘뒤인 11일 이사회를 통해 은행 전환을 결의한다. 91년 3월15일. 한국투금은 재무부로부터 드디어 은행전환을 위한 내인가를 받게 된다. 은행전환 프로젝트가 일사천리로 진행됐지만 그렇다고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한국투금의 지분 30%를 보유하고 있던 최대주주 장기신용은행이 이를 반대한 것이었다.

90년 가을쯤. 김승유 한국투금 전무(현 하나은행장)와 김연수 장기신용은행장(89년 2월∼92년)이 마주앉았다.

▲김연수 행장:재가를 하려면 자식은 떼어 놓고 가지 왜 자식까지 데려가려고 합니까.

▲김승유 전무:장은은 어차피 한국투금의 대주주 아닙니까. 한국투금이 은행으로 전환하면 대주주에게도 좋은 일인데 왜 반대하는 겁니까?

▲김행장:어쨌거나 경쟁은행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죠. 경쟁자가 생기는 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김전무:장은은 기업금융 전문은행이고 우리는 일반 상업은행이 되는 거니까 오히려 상호보완하며 클 수 있습니다.

▲김행장:아무튼 안돼요. 굳이 재가를 하려거든 자식은 놓고 가요.

김연수 행장이 언급한 ‘자식’은 한국투금이 갖고 있던 한국투자증권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국투자증권은 한국투금이 증권업 진출을 위해 80년 1월 인수한 태평증권이 그 전신. 태평증권은 인수당시 자본금이 8억5000만원에 불과했지만 불과 1년 만에 400억원으로 껑충 뛰었고 영업수익도 10배 이상의 신장세를 기록할 정도의 ‘알짜배기’ 회사였다. 장은이 탐낼 만한 회사였던 것이다. 한국투금은 결국 ‘황금알(한국투자증권)’을 과감히 포기하고 은행 전환을 선택한다.

◇내키지 않는 ‘은행인수’=은행 전환후 중소형 우량은행으로 조용히 성장하던 하나은행에 ‘격랑’이 불어닥친 것은 98년 봄. 당시 은행 1차 구조조정 물살에 ‘자의반 타의반’ 휩싸이면서 하나은행은 ‘전환은행’이라는 옛 껍질을 벗게 된다. 하나가 5개 퇴출은행(동화·대동·동남·경기·충청)중 충청은행을 인수하게 된 것이다. 하필이면 왜 아무 연고도 없는 충청은행이었을까.

김승유 하나은행장과 금융계 인사의 회고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 있다.

“하나은행은 98년 봄 보람은행과 인수합병 협상을 진행중이었다. 예정대로 라면 7월초에 합병을 선언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정부가 퇴출은행중 한 곳을 인수해주길 희망했지만 하나은행은 관심이 없을 수밖에. 그러나 금감위에서 6월중순 무렵 국민·주택·신한 등 인수후보 은행 직원들을 대상으로 비밀리에 퇴출은행 접수 교육을 실시하자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인수은행에 끼지 못하면 부실은행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것으로 우려한 것이다. 그동안 소극적이던 한미은행이 발빠르게 수도권에 189개의 점포를 가진 경기은행을 인수하겠다고 먼저 ‘찜’해버렸고 타이밍을 놓쳐버린 하나은행은 울며겨자먹기로 당시 부실이 가장 심각한 충청은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은행이 충청은행 인수를 놓고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는 당시 금융구조개혁 기획단 관계자의 메모에서도 알 수 있다.

“98년 6월27일 토요일. 이번 주말에는 별일(퇴출 발표)이 없을 것 같아서 맘 편하게 퇴근. 하나가 충청은행 인수를 막판까지 고사해 은행 퇴출작업이 상반기를 넘길 분위기. 28일 새벽 집으로 긴급전화가 걸려옴. 이헌재 위원장과 김승유 하나은행장이 밤샘 협상을 거쳐 방금 합의에 도달했다는 급보. 잠이 확 깼다. 인수은행에 오후 2시 집결 명령.” 사상 초유의 은행퇴출작업이 하나의 충청인수를 마지막으로 최종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충청은행의 부실정도는 당시 은행 경영평가위원회의 보고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기아 해태 한보 미도파 나산그룹과 지역건설업체에 대한 거액여신 부실로 대규모 자본잠식, 수익성 크게 악화. 1500억원 이상 증자할 계획이나 BIS비율에는 크게 부족. 증자 참여 예상업체들도 재무구조 불량해 증자 이행여부도 미지수. 자구계획 불승인.’

◇전화위복된 충청은행 인수=98년 6월28일(일) 오후 2시 서울 공평동 제일은행 본점 2층. 하나·국민·신한 등 인수은행의 직원들과 금감위 인력, 경찰 등이 뒤섞여 북적거리고 있다. 이들은 청와대와 금감위로부터 퇴출은행 접수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같은 시각 청와대 부근 모처.

▲이규성 장관:은행들이 상반기 결산을 마칠 수 있도록 5일 정도 기다려 7월3일쯤 (퇴출은행 명단을) 발표토록 합시다.

▲이헌재 위원장:시중에 퇴출은행 명단이 돌고 있어 곧 해당은행에 예금인출 사태가 일어날 것입니다. 내일(6월29일, 월) 영업개시 전에 퇴출은행을 접수해야 합니다. 두 경제수장간의 난상토론이 몇시간째 이어졌고 밤 9시 드디어 접수 명령이 떨어졌다. 인수은행 직원들은 인천(경기), 대구(대동), 부산(동남), 대전(충청)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새벽 5시 퇴출은행들을 전격 접수한다.

이 때도 하나은행은 정신이 없었다. 발표 몇시간 전에야 충청은행 인수를 최종결정했기 때문에 준비작업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상태.

김인환 당시 충청은행 인수팀장(현 삼성센터지점장)의 회고.

“28일 오후 김행장이 불러 올라갔더니 충청은행을 인수한다고 말해서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정도로 은행내에서는 사전 준비작업이 없었다. 직원들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고작 직원 2∼3명이 지점 하나씩 접수해야만 했다.”

정치권이 퇴출 저지로비를 벌이는 등 최악의 상황은 피할 것으로 믿은 충청은행 직원들도 ‘황당’해하기는 마찬가지. 당시 대전 성남동지점에서 근무했던 송중호 과장의 회고. “충청은행은 퇴출은행에서 제외될 것으로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에 29일 보도는 언론사가 오보를 낸 줄 알았다.”

때문에 충청은행 직원들의 반발은 예상외로 거셌다. 전산시스템 열쇠를 가지고 사라져 하나은행 직원들이 일일이 수기(手記)로 업무를 해야 했으며 장부정리로 매일 밤을 지새웠다. 날밤을 세우던 직원들이 자칫 잘못해 장부에 ‘0’을 하나 더 표기하면 순식간에 10억원이 100억원으로 둔갑하는 큰 혼란이 발생할 수 있었다. 뒤늦게 인수작업에 참석한 관계로 5개 인수은행들중에서 복구작업이 가장 늦기도 했다.


그러나 충청은행 인수로 하나은행이 얻은 것은 예상보다 컸다. 당시만 해도 후발 중소형 은행 정도로 여겨졌던 하나은행이 일순간에 국내 5대 우량은행으로 자리잡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김승유 행장은 “지금 생각해 보면 충청은행 인수가 하나은행이 지금의 대형은행으로 자리잡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계기가 됐다”며 “만일 인수은행에 하나은행이 빠지고 보람은행이 들어갔더라면 지금의 하나은행은 아마 보람은행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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