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칼럼] 취업이 ‘가문의 영광’

박형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10.22 10:15

수정 2014.11.07 13:01


“나 항상 그대를 보고파 하는데 맘처럼 가까울 수 없어.

오늘도 빛바랜 낡은 사진 속에 그대 모습 그리워하네.

나 항상 그대를 그리워 하는데….”

관객 400만명을 돌파한 ‘가문의 영광’이라는 영화 속에 나오는 ‘나 항상 그대를’ 이라는 노래의 가사다. 배우 유동근과 김정은, 정준호가 주연한 코믹 영화다.

깡패집안인 유동근과 김정은 남매가 국내의 유수한 대학을 나오고 해외 유학을 마친 후 외국 벤처기업의 한국지사장으로 있는 정준호를 매제로 삼기 위해 벌이는 해프닝이 영화의 줄거리다. 영화에선 재력과 학벌을 갖춘 매제를 맞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 피나는 노력이 전개된다. ‘나 항상 그대를’ 이라는 노래는 영화 속 카페에서 여주인공 김정은이 옛애인을 따라가는 정준호가 돌아와 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피아노를 치며 부른 노래다.
왕방울 만한 김정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부르는 이 노래가 몹시 애처롭게 들린다. 이 장면이 많은 관객들에게 찡한 감동을 줘 기억에 오래 남도록 한 것 같다. 그래서 영화가 종영된 이후에도 이 노래는 한동안 꽤 유행한 것으로 기억한다.

종영된지 오래된 이 영화를 새삼 장황하게 얘기하는 것은 최근 이 노래가 나오는 영화제목과 동명(同名)이면서도 이 영화의 특정 장면 못지 않게 가슴을 찡하게 하는 또 다른 아픔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젊은이가 주인공이지만 가슴에 꽂히는 아픔의 강도는 영화보다 훨씬 크다. 장래가 구만리 같은 청년 대학졸업 예정자들이 슬픈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이 당면한 최대의 화두는 ‘취업’이다. 하지만 최근의 대학 취업난은 예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취업의 어려움을 묘사하는 유행어로 ‘바늘구멍 취업’이나 ‘취업 전쟁’이라는 말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최근 대학가에선 심각한 취업난을 풍자한 색다른 유행어가 등장했다. 대학가에서 새로운 유행어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 히트 영화 제목과 같은 ‘가문의 영광’이다. ‘가문의 영광’은 대학졸업 예정자 중 10대그룹에 채용된 친구들을 두고 부러움에서 하는 말이라고 한다. 취업난 유행어 중에선 압권이다.

서울에 있는 한 대학교는 졸업 예정자가 중소기업 채용시험에 합격했다고 정문에 축하 플래카드까지 걸어 놓았다. 지난 추석에 고향가는 길에 작은 시골학교 출신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고 내건 플래카드를 보고 흐뭇해했던 적이 있다. 취업축하 플래카드는 이와는 상반된 감정이 묻어난다. 어쩌다 세상이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속이 쓰리고 아프다.

인터넷 취업포털 잡링크는 올해 대학 졸업예정자가 28만여명에 달하나 하반기 기업채용 규모는 최대 12만명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대학 졸업자의 60%가 백수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되는 셈이다. 주요 기업 86개사의 하반기 취업 경쟁률이 평균 87대1로 예상된다. 지난해 67대1보다 훨씬 높아진 사상 초유의 경쟁률이다.

졸업 예정자들이 이 기업 저 기업에 복수 취업을 해놓고 진로 선택에 고민을 했던 것을 기억하는 부모세대로선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풍토다. 젊은이들이 사회진출을 앞두고 찬란한 미래를 설계하며 부푼 꿈에 젖어야 할 때 주눅들고 기죽어 있는 모습이 부모들로선 여간 애처롭지 않다. 이로 인해 상아탑이 멋과 낭만은 없고 수심과 고뇌로 점철돼 있다. 어떤 기업에선 봉급이 많은 자신보다 아들을 고용해 줄 것을 회사에 간청했다고 한다. 어찌 이같은 마음이 그 부모뿐이겠는가.

지난 9월 정부 고용동향에선 실업자 수가 73만여명, 이중 청년실업자수가 30만여명으로 집계됐다. 서울대학교의 지난해 졸업생 취업률도 46.5%에 그쳤다고 한다. 그중 순수 취업률은 31.45%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실직상태라고 한다. 청년 실업문제의 심각성에 부연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다. 사정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 데도 누구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걱정해주지 않는다. 정부 당국도 마찬가지다.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젊은 청년들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면 나라의 장래도 밝지 않다.
다음 세대들에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선 고용시장의 확대정책과 새로운 실업대책이 절실한 때다. 다시는 대학에서 취업을 두고서 ‘가문의 영광’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그런 세상을 빨리 보고 싶다.

/박형준 유통부장 부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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