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칼럼] 기업이 먼저 고해성사를 하자

이연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10.27 10:16

수정 2014.11.07 12:55


재신임·비자금 정국이 날로 확산돼 이제는 정치권의 고해성사뺑정치적 대사면→정치개혁이라는 시나리오로 전개되고 있다. 이같은 시나리오와는 별도로 일부 정치권에서는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대선자금에 대한 전면적이고 무제한적인 특검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권의 이같은 움직임은 해도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고해성사는 ‘다같이 죽어 거듭나자’는 것보다 ‘서로 없던 걸로 하고 다같이 살자’는 고식지계(姑息之計)로 비치고 있다. 흔들리는 정권의 도덕성을 국민투표에 의한 재신임으로 반전하려는 통치권자의 임기응변적인 대응자세도 그렇고, 처음엔 한푼도 안받았다던 거대 야당은 그 뒷거래가 속속 밝혀지자 ‘왜 나만 따지느냐’며 검찰총장까지 위협하고 있으니 말이다. 도대체 그들의 속내를 국민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고해성사일까.

민주주의는 ‘백성(民)을 주인(主)으로 삼자’는 논리아닌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다.
재신임이든, 고해성사든, 대사면이든 그 심판의 주체는 국민이다. 과연 이 나라 국민들은 분열과 위기를 조장해온 정치권에 쉽사리 재신임을 주고 사면을 허락할 것인가.

지금 장안은 온갖 의혹과 설(說)들로 가득 차 있다. ‘어디 SK뿐이겠는가. 또 한나라당이 그 정도면 집권당은 얼마나 먹었을까’, ‘어느 기업은 당선축하금으로 얼마를 썼어’, ‘이번에도 거물 정치인 몇명 집어넣는 걸로 적당히 얼버무릴 것’이라는 등등.

정치권이 고해성사를 하면 (국민이 원하지 않아도)사면받을지 모르지만 애꿎은 기업들은 그렇지 못하다. 기업은 항상 정치권 싸움의 희생양이었다. 가뜩이나 기업들은 최근 대선자금 계좌추적 움직임에 숨을 죽이고 있다.

대그룹들은 공식, 비공식적으로 불법 비자금 조성을 부인하고 있지만 좌불안석이 아닐 수 없다. 검찰이 전면적으로 계좌추적에 나설 경우 어느 기업인들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다.

그렇다면 이 참에 기업이 먼저 선수를 치면 어떨까. ‘어느 어느 당에 또는 정치인에게 어떤 명목으로 (합법적인 정치헌금 이외에) 정치자금을 건넸다’는 고해성사를 하면 어떨까. 더 나아가 ‘우리는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권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솔직하게 고백을 하자. 그리고 국민들에게 용서를 빌자. 그래서 다시는 이 땅에 정경유착의 고리가 발을 못붙이게 하자. ‘기업윤리 대헌장’(가칭)이라는 행동강령을 만들어 이 땅의 모든 기업인들에게 서명을 받아내자.

쥐가 고양이를 물어야 얘기가 되는 정국이니 그냥 덩달아서 해본 소리가 아니다. 자해(自害)소동을 벌인 뒤 정치권에 싸움을 걸어보자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죄를 뉘우치는 자를 너그럽게 대하는데 익숙지 못한게 현실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권력을 잡은 정치인들보다는 아둔하지만 스스로 단죄를 청하는 기업인편에 설 것이다. 그 뒤의 일은 검찰로 떠넘기면 된다.

‘우리 보고 검찰을 믿으란 말인가. 우리가 왜 정치개혁이라는 허울좋은 명분을 위해 스스로 발가벗어야 하는가. 대외신뢰도는 어떻고 그 후유증과 파장은 누가 막겠는가’라고 되물으면 속시원한 대답이 없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업이 정치의 시녀여야 하는가. 입은 있어도 말을 못하고 보고도 못본 체해야 하고 들어도 못들은 척해야 하는 게 더 이상 한국 기업의 불문율일 수는 없다. 기업도 엄연히 경제주체이고 주권을 가져야 한다. 이제는 기업도 정치의 무능과 부도덕을 질타하는 입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양심선언밖에 없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일은 일시적인 자신의 피해보다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이 나라 경제다.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을 말로만 외칠 것이 아니라 1만달러 사수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나홀로 침체에 빠진 한국 경제를 건져올릴 주체는 오로지 기업밖에 없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듯 불법을 저지른 기업인에게 책임을 묻되 기업은 살려야 한다.


다른 기업(또는 사람)은 몰라도 우리 기업(또는 나)은 안된다고 끝까지 버틴다면 어쩔 수 없다. 강압적인 고해성사는 이미 고해성사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래, 너만은 참 깨끗하구나’라고 인식할 국민은 아무도 없다.

검은 뒷돈거래의 실상이 소상하게 밝혀지기도 전에 정치권이 먼저 재신임, 대사면, 제도개혁 등을 운운하며 국민들을 현혹하고 있기에 애꿎은 기업에 호소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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