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칼럼] 한국정치와 마키아벨리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10.28 10:17

수정 2014.11.07 12:53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마음 속에나 의뭉스럽게 품고 있어야 할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바람에 지난 500년 동안 인륜을 저버린 비도덕주의자로 꾸준히 비난을 받아온 인물이 바로 니콜로 마키아벨리다.

그가 살았던 15∼16세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는 주변 강대국들의 등쌀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낳은 르네상스의 꽃이었으나, 프랑스·스페인·베네치아 등 강대국들에겐 만만한 상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 ‘정략론’ 등 몇권의 책에는 이같은 시대 상황이 녹아 있다. 힘 없는 조국 피렌체에 실망한 관료 출신의 정치 사상가가 가혹하지만 힘센 군주론을 내세운 것은 당연하다.

그의 사상이 500년 동안 논란의 한복판에서 비켜나지 않은 것은 곧 그의 어록에 곱씹어 볼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는 뜻이리라. 어록을 몇군데 들춰보면 마치 오늘날의 우리 정치판을 두고 얘기하는 듯하다.
마키아벨리의 지혜 또는 선견지명 몇가지를 예로 들어보자.

#1=“새 질서를 확립하는 것만큼 어려운 사업은 없다… 왜냐하면 실행자는 현 체제 아래서 단물을 빨아먹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돌릴 뿐 아니라, 새 체제가 되면 ‘덕’을 볼 사람들로부터는 미적지근한 지지밖에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군주론, 한길사 간행 ‘마키아벨리 어록’>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참여정부를 이끄는 핵심층이 무릎을 내리칠 탁견이 아닐 수 없다. ‘단물을 빨아먹던’ 이른바 보수 반동들은 “아, 옛날이여”를 노래하며 박정희 시대의 향수에 젖어들 낌새다. 반면, 노사모 홍위병을 자처하는 명계남씨 같은 소수의 사람들을 빼면, 지지 세력들은 ‘미적지근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뚝뚝 떨어져 나갔다.

#2=“군주가 엄중하고도 엄중하게 경계해야 할 일은 경멸당하거나 얕잡아보이는 것이다.<군주론>

노대통령이 “언제 대통령 대접해 준 적 있냐”고 투덜거린 말이 떠오른다. 일부 야당 의원들은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국회에 입장할 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걸 자랑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만만하게 보인 지도자에게 먼저 그 책임이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3=“측근에 어떤 사람을 고르느냐 하는 것은 군주로서의 능력을 측정하는 좋은 기준이 된다.”<군주론>

청와대 이광재 국정상황실장이 사표를 냈다. 역설적이지만 사표을 내라고 윽박지른 사람은 적이 아니라 아군이다. 참여정부 출범의 일등공신인 열린우리당의 천정배 의원이 총대를 멨다. 측근 기용에 문제가 있음을 집권세력이 스스로 인정한 꼴이다. 마키아벨리는 거꾸로 “측근이 유능하고 성실하면 그를 택한 군주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웠다.

#4=“조국의 존망이 걸렸을 때는 그 목적에 유효하다면 어떤 수단도 정당화된다.”<정략론>

백척간두에 서서 수단의 옳고 그름을 놓고 고심하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다는 얘기다. 마키아벨리가 두고두고 손가락질을 받는 대목이기도 하다. 반면, 체면보다 실익, 과정보다 결과를 더 높은 가치로 치는 현실중시파들이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명구 중의 명구다. 북한핵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헷갈릴 때마다 이론적 근거로 삼을 만하다.

그러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은 잘 새겨들어야 한다. 정권 획득(목적)을 위해서라면 지하 주차장에서 뭉칫돈을 받는 것(수단)도 정당하다고 강변한다면 마키아벨리가 노발대발할 것이다.

지도자에게 민중의 미움을 사지 말라고 입이 닳도록 강조한 사람은 다름아닌 마키아벨리다. 지도자가 철권통치로 질서를 유지하는 것과 부패로 미움을 사는 것은 마키아벨리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는 특히 사람들의 재산에 손을 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구린내 나는 정치자금은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를 갉아먹는다. 그 최종 피해자는 국민이다.


돈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정치인들, 또는 가서는 안될 카지노에서 새벽잠을 설쳐가며 수백달러를 잃었다는 정치인을 위해 마키아벨리가 남겨놓은 어록도 있다.

“국가가 법률을 만들어놓고 지키지 않는 것처럼 해로운 일은 없다.
특히 법률을 만든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경우는 두말할 것도 없이 최악이다.”<정략론>

/곽인찬 인터넷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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