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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클리닉] ‘빌리다’는 ‘빌려주다’, ‘빌려오다’로 구분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3.12.04 10:27

수정 2014.11.07 12:02


우리말에 하나의 어휘가 두가지의 상반된 행위를 함께 지칭하는 것이 있다. ‘빌리다’가 그것이다.

사전에서 ‘빌리다’를 찾아보면 ①(나중에 돌려받기로 하고) 남의 물건이나 돈 따위를 얻어다가 쓰다. 빌려오다. ②(나중에 도로 받기로 하고) 남에게 물건이나 돈 따위를 내주어 쓰게 하다.

빌려주다. ③남의 도움을 받다. ④어떤 형식이나 사실을 끌어다가 쓰다. ⑤어떤 일을 하기 위해 기회를 얻다 등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나온다.

①빌린 책을 잃어버렸다. ②빌린 책을 도로 받았다. ③친구의 힘을 빌렸다. ④일기형식을 빌린 자전적 소설 ⑤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처럼 활용된다.

‘빌리다’가 빌려주다(貸)와 빌려오다(借)라는 두가지의 상반된 행위를 아우르는 뜻을 갖게 된 것은 1988년 1월19일 문교부 고시로 표준어 규정이 공포된 이후부터다.

표준어규정 제6항에 ‘다음 단어들은 구별함이 없이 한가지 형태를 표준으로 삼는다’고 하면서 ‘돐→돌, 두째·세째·네째→둘째·셋째·넷째, 빌다→빌리다’의 경우 뒤의 것으로 통일시켰기 때문이다. 표준어규정해설 제6항에 “빌다에는 ‘걸(乞)’, ‘축(祝)’의 뜻이 있기에 차(借)의 뜻으로는 ‘빌려오다’로, 대(貸)의 뜻으로는 ‘빌려주다’로 하여 ‘빌리다’에 다 들어있는 것으로 처리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표준어규정이 시행되기 이전에는 ‘빌다’는 차(借)로, ‘빌리다’는 대(貸)로 했던 것을 바꾼 것이다. ‘갑돌이에게 100만원을 빌어왔다’고 하면 거저 비럭질해왔는지, 아니면 나중에 갚기로 하고 꾸어온 것인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빌리다’가 대(貸)와 차(借)의 의미를 동시에 갖게 되자 또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갑돌이가 갑순이에게 100만원을 빌렸다’고 하면 이것만으로는 ‘빌렸다’가 ‘빌려줬다’, ‘빌려왔다’라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차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문장의 앞뒤를 살펴 헤아리는 수고를 따로 하게 된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돈셈이 복잡해서일까. 대차관계를 나타내는 ‘꾸다’와 ‘꾸이다’도 곧잘 헷갈린다.

‘꾸다‘는 ‘도로 갚기로 하고 남의 것을 얼마 동안 빌려 쓰다’란 의미이고, ‘꾸이다’는 ‘꾸다’의 피동형이며 준말이 ‘뀌다’이다. 즉 ‘꾸다’는 차(借)요, ‘꾸이다’는 대(貸)인 것이다.

‘갑돌이가 갑순이에게 100만원을 꾸어주었다’는 글에서 갑돌이 돈 100만원이 갑순이에게 간 것으로 알면 잘못이다.
이 경우는 ‘갑돌이가 (돈이 없어서 을순이에게 빌려다가) 갑순이에게 꾸어주었다’는 뜻이다. 갑돌이 돈이라면 ‘갑순이에게 뀌어주었다’로 해야 한다.


‘빌리다’는 대차의 뜻을 아우르고 있으니 되도록 ‘빌려주다·꾸이다(뀌다), 빌려오다·꾸다’로 명확하게 구획정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leciel98@fnnews.com 김영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