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미술관 큐레이터 그들이 사는 법] “그림에 묻혀사니 행복해요”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4.04.08 11:01

수정 2014.11.07 19:24


“못 박는 일부터 전시기획, 도록(圖錄)편집, 작가섭외, 작품선정, 홍보, 전시장 조명 조정, 관람객 안내 등등… 이 모두가 큐레이터의 몫입니다. 1인 10역이죠.”

기자가 만난 큐레이터의 첫마디였다. 서울 평창동,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가나아트센터를 찾았다.

오전 9시, 조용하던 이곳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가나아트의 전시를 책임지고 있는 큐레이터 김미라, 윤옥영, 김지연씨의 일과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9시가 조금 넘어 시작되는 회의는 각자 자신이 맡은 전시의 진행상황에 대해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회의가 끝나면 담당한 전시 기획안을 짜고 작가의 자료도 수집하고 언론사에 보낼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등 책상에서 해야만 하는 각종 업무를 처리한다.

이들 큐레이터 중 맏언니격인 김미라 수석큐레이터는 현재 김병종 전시와 5월에 열릴 기획전 준비에 한창이다.

김병종 전시는 이미 2주 전부터 갤러리에서 전시가 되고 있고 기획전은 이제 기획과 작가 선정이 반쯤 끝난 상태다. 기획전은 아직 언론에 알릴 단계는 아니지만 ‘색깔’에 관한 기획전이라고 살짝 귀띔해준다.

이들의 일과를 카메라에 담고자 회의장면과 작업장면을 사진기자가 연방 찍어댔다. 이들은 사진취재에도 아랑곳않고 작품과 전시에 대한 정보를 끊임없이 주고받고 있었다.

“박래현 화백 작품의 띠들은 어떻게 한 거예요.”

“아교를 사용해 투명한 번짐의 효과를 냈다고 하대요.”

“아교로 그런 효과가 나나요.”

“그게 경험에서 나온 자신만이 가진 기술이래요.”

일하는 중간중간 걸려오는 전화는 이들의 분주한 삶을 대변하는 듯했다.

“내일 충남 금산군청에서 20여명이 전시를 보러 온대요. 군청에 복합예술관을 만들려는데 갤러리 벤치마킹 차원에서 오는 거죠.”

또 은행 프라잇뱅킹(PB)팀 직원들은 고객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단체로 관람하기도 하고 종종 문화원이나 모임에서 오겠다는 전화도 걸려온다. 이들의 도슨트(안내)를 맡는 것도 큐레이터의 업무 중 하나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신경써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전시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일단 어떤 전시가 기획이 되면 큐레이터는 작가의 작업실을 직접 찾아간다.작품에 대한 작가의 설명을 일일이 듣고 출품할 작품을 선정하기 위해서다. 작품 반입 일정을 정하고 작품 도록 작업을 위해 슬라이드 촬영도 해야 한다.

평론가에게 글을 청탁해서 받는 것도 큐레이터가 할 일이다.

전시가 열리기 한달 보름 전까지 준비 작업을 마치게 되면 디자인팀과 상의해 도록 디자인을 결정하고 일일이 작품 스캔을 받는다. 전시가 2주 앞으로 다가오면 이때부터 큐레이터는 홍보맨으로 변신한다. 언론사 등에 보낼 보도자료를 작성하고 미술기자 간담회 일정도 잡는다.

전시가 코앞으로 다가오면 전시장의 조명을 맞추고 작품의 네임텍까지 직접 달아야 한다.

전시 오픈 날도 바쁘긴 마찬가지다. 방명록 준비와 뒤풀이 장소 예약 등 조그만 일이라도 큐레이터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다.

“99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큐레이터를 맡은 하랄드 제만이 ‘from nail to vision’이라는 말을 했어요. 큐레이터는 못 박는 작은 일부터 비전을 제시하는 것까지 전부 할 줄 알아야 된다는 거죠. 그 말에 100% 공감하고 있어요.”

하지만 A부터 Z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전시에 대해 애착심도 생기고 전시를 마친 후 보람도 크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최근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이는 큐레이터의 모습 덕분에 전문직인 큐레이터에 대한 인지도가 많이 높아졌다. 하지만 큐레이터들은 자신을 ‘백조’라 부른다. 겉으로는 우아한 척하지만 물 밑에서 물갈퀴 다린 발을 쉼없이 놀려야 하는 백조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고학력에 박봉’이기 때문에 큐레이터에 대한 섣부른 환상은 버리는 게 좋다고 충고한다.

큐레이터들은 대부분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일을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또래에 비해 대우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4대 보험을 보장해 주는 곳도 시·도에서 운영하는 미술관과 상업화랑 10여개 정도다.

화랑업계에 따르면 평균 초봉은 연 1400만∼2000만원가량. ‘잘나가는’ 경력인 경우 연 4000만∼5000만원선이 되기도 한다. 고액 연봉의 큐레이터는 겨우 손꼽을 정도다. 일부 화랑의 경우에는 기본급 60만∼70만원을 기준으로 하고 작품 판매시 작가, 화랑과 협의해 일정 비율의 커미션을 받기도 한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미술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주말에 가족과 함께 놀이동산 가서 20만∼30만원쯤 쓰고 오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지만 미술관에 다녀왔다고 얘기하면 특별한 사람인양 생각하거든요. 미술관이 훨씬 적은 비용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모르는 거 같아요.”

사람들이 미술에 관심이 없는데는 우리나라 교육이 한몫을 했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대부분 학교에 다닐 때 수채화나 판화 등 실기위주의 미술 교육을 받거든요. 하지만 그림을 보는 법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아요. 점 하나만 찍은 이우환 화백의 그림을 보고 ‘왜 저것을 보고 사람들이 열광할까’라고만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외국에서 본 미술관은 우리와 다르다고 말했다.

“대학원 시절에 파리 로댕미술관에 간 적이 있어요. 거기서 유치원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미술관 바닥에 앉아서 스케치북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데생하고 있는 걸 봤어요. 또 조그만 아이들이 교사와 작품에 대해 장시간 토론하는 모습도 너무 자연스러웠고요.그런 아이들 때문에 미술이 발전할 수 있는거죠.”

자세히 들여다본 큐레이터는 생각보다 힘든 직업임에 틀림없었다.


“물론 힘들죠.그래도 좋은 그림 실컷 보고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기자가 만난 그들은 힘든 일을 하면서도 얼굴은 아주 밝았다.

/ pompom@fnnews.com 정명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