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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빌라도의 예수]빌라도의 눈으로 바라본 예수,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4.07.29 11:36

수정 2014.11.07 16:02


가장 보편적인 진리 속에 가장 엄청난 역설이 숨어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현대 과학의 발견으로, 우리는 실제라 생각한 것이 사실은 실제가 아닌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결국 우리의 감각 세계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4차원이라 부르며 성경은 이를 천국이라 부른다. 이곳은 유한과 무한이 만나는 곳이며 영원이 열리는 영의 자리이다.



현대 심리학은 인간의 인성을 탐구하면서 자아와 초자아라는 어휘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미 수세기 전부터 혼과 영의 구분은 있어 왔고, 성경에서는 “관절과 골수를 쪼갠다”는 표현으로 그 구분의 미묘함을 비유하고 있다. 인간의 혼은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실제성까지는 받아들이지만 부활에 대해서는 멀리서 그 상징성만을 바라본다. 예수의 부활이나 신성은 영의 눈이 열릴 때에야 비로소 깨달아지는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듣고 나름대로의 개념을 갖는다. 바로 여기서 ‘인간 예수’, ‘신학의 이데올로기’ 혹은 ‘예수는 신화다’와 같은 개념들이 나온다. 그러나 이는 혼에 속한 것으로 영에 속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는 다르다.

인간의 혼적인 의지는 영의 깊이로 나아가기까지 끝없는 갈망을 계속한다. <빌라도의 예수>를 쓴 작가 정찬도 ‘빌라도’라는 이름을 빌어 영적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는 “문학은 자유를 추구하는 어떤 생명체다. 이 생명체가 특정 이데올로기에 갇힐 때 자유의 날개는 꺾인다. <빌라도의 예수>를 쓰면서 내가 갈망한 것은 자유의 깊이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혼적인 자유는 진정한 자아의 궁극적 실재인 영의 자리에 도달하기까지는 엄밀히 말해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문학 또한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는 생명체라 볼 수 없다.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생명은 영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빌라도의 예수>는 로마제국의 유대 총독으로서 예수의 처형을 승낙해야만 했던 빌라도의 입장에서 예수를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작가가 신성모독으로까지 몰고가지 않는 것은 빌라도의 눈을 통해 보편적 관점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그림으로써 예수의 신성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빌라도는 알프스 산맥의 한 자락인 필라투스산에 은거하면서 자신의 삶을 회상한다. 그리스도 교인이 된 아내 프로쿨라와의 마지막 만남은 그를 유랑자로 변모시킬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녀의 영혼은 명료했다. 무엇이 프로쿨라로 하여금 자신이 나무에 매단 그 남자를 사랑하게 했는가. 그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프로쿨라는 말했다. 기도를 하는 것은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을 알기 위함이라고. 그는 그녀가 기도를 통해 안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는 홀로 기도했다. 기도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였다. 깊이 들어갈수록 자아는 희미해졌다. 희미해지고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사라지면서 영원의 물결이 밀려왔다.”

소설 속 빌라도는 육적인 자아의 껍질을 벗고 진정한 자아를 입는 영의 문턱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긴 여정의 마지막을 열어준 것은 손에 못이 박힌 예수였다.


“그는 자신이 새로 태어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놀랍도록 신비한 느낌이었다.


필자는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정찬의 예수>는 종교적이지도 신화적이지도 혹은 정치적이지도 않은 피흘리는 예수였다는 결론을 내려본다.

/최종옥 북코스모스(www.bookcosmos.com)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