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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잘하면 왜 투자 안하겠나”…기업인들,제주 포럼서 정부·정치권에 쓴소리

한민정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4.08.01 11:37

수정 2014.11.07 15:55




“우리가 언제 정부에 기대고 돈달라고 했습니까. 정부가 최소한 목표와 비전은 제시해야 기업들이 따라갈 것 아닙니까.”

지난달 28∼31일 제주도 서귀포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주 서머 포럼’은 기업인들의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불신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자리였다. 기업과 경제계 인사들은 현 상황을 ‘정치적 위기로 인한 국가적 위기’ 상태로 단정하고 정치권이 변하지 않으면 나라의 미래가 위태롭다고 일갈했다.

또 강신호 회장의 ‘기업책임론’은 곧 ‘현 정부에 대한 희망이 더 이상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포럼 첫날 이헌재 부총리가 “기업 스스로 내재된 구조 한계를 극복하고 투자를 주저하는 무기력증과 소극적 경영을 떨치고 일어날 의무가 있다”고 밝히자 둘째날 전국경제인연합회 강신호 회장은 “경제위기는 기업인들의 책임이며 정부에 의존하지 말고 기업 스스로 자립하자”며 기업책임론을 내세워 정부와 재계간의 화해무드가 감돌았다.

그러나 정작 기업의 운영 주체인 최고경영자(CEO)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정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다.

한전기공주식회사의 이경삼 사장은 “기업이 죽어나가는 판에 정치권은 유신정권, 행정수도 이전 공방만 벌인다”면서 “경제를 살릴 생각을 해야지 엉뚱한데(행정수도 이전) 100조원의 돈을 퍼붓고 있다”고 말했다.


포스코 경영연구소 오관치 소장이 강연에 앞서 “앞으로 정치인들에게는 정치인세, 국민고통부가세 등을 내도록 해야 한다”며 우스갯말을 하자 포럼 참가 기업인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우리가 하고 싶었던 말”이라며 호응했다. 오소장은 “경제가 어려우니 기업들이 투자하라고 얘기하는데 이는 순서가 뒤바뀐 것 같다”며 “미래가 보여야 기업들이 투자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한국동공업협동조합의 김형진 이사장은 “부총리는 기업이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했는데 각종 규제로 기업을 묶어 놓고 어떻게 스스로 자립하라는 것이냐”면서 “규제를 다 없애주든지 그렇지 못하면 정부가 비전을 제시하라”고 항변했다.

동국산업 임순명 상무는 “중국과 비교해도 우리나라 공무원은 책상에 앉아서 모든 서류를 가져와라, 숫자가 틀렸다 그러는데 중국 공무원은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되레 기업인들에게 촌지를 주는 형편”이라며 “우리나라는 기업하기 좋은 국가 순위에서 늘 하위권을 맴돌고 있다”고 비난했다.

기업인들의 정부와 정치인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포럼 마지막날 연사로 나선 열린우리당 홍재형 정책위원장은 졸지에 봉변을 당했다. 홍위원장이 “기업이 자신감을 잃은 것은 기업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며 이는 기업환경에 대한 불안감보다 기술력과 경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발언이 기업인들의 가슴속에 쌓인 분노에 불을 댕기는 촉매제 작용을 했다.

선진㈜의 박성수 사장은 “정부와 여당의 얘기가 서로 다르니 기업들은 불안해 투자를 안하고 있다”면서 “정부가 전경련 등 경제단체와 거리를 두고 대화를 안하니 당연히 기업들이 불안하게 느끼는 것 아니냐”고 정부와 여당의 정책 혼선을 꼬집었다.

홍위원장이 무엇이 혼선을 빚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반응하자 삼우EMC 정규수 회장은 “정부는 성장 위주라고 하는데 모든 여건은 분배위주로 돌아가니 기업은 혼란스럽다”고 밝혔다.

홍위원장이 재차 ‘꼭 집어서 어떤 정책이 혼선을 가져오냐’고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에게 묻자 기업인들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좌원장이 “제가 어느 편을 들어야 됩니까”라고 답변을 회피하자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박성수 사장은 “어느 편이냐니, 당연히 기업편을 들어야죠”라고 소리를 내질렀고 또 다른 기업인은 “중소기업은 정부의 성장 정책이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비정부기구(NGO) 활동을 한다는 한 여성은 “홍위원장이 무엇이 혼선인지 모른다니까 일반 대중의 분위기를 얘기하겠다”면서 “주5일제로 직원들의 인권을 향상시키는 것은 좋은데 기업인들이 그만큼 회사하기 어려운 것은 감안하지 않아 기업가는 망하라고 하는 것 같다”고 말하자 기업인들은 박수로 동의를 표했다.

그는 또 “투자를 하면 당장 죽을 것 같은데 이런 경영 환경에서 정치인보고 경영하라면 하겠느냐”며 “누구도 물 사업을 하다가 망하지 않았느냐”면서 날카롭게 지적했다.

홍위원장이 “물 장사해 본 사람이니까 기업의 어려움을 더 잘 알지 않겠느냐”면서 “지금까지는 정부가 이끌어왔으나 이제는 기업도 노력해야 할 시점”이라며 “미래의 주인공이며 이 나라의 주인은 기업인”이라고 말했다.

기네스리 그룹의 이왕열 대표이사는 “미래 주인공이 기업인이라면 돈 버는 사람이 왕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고 요청했다.

기업인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은 ‘정부에 대한 희망이 없음’과 ‘정치적 위기’로까지 번져갔다.

강신호 회장이 “정부에 대한 기대를 버린다는 말이 아니라 신 성장동력을 구축하기 위해 기업인들이 열심히 해야한다는 의미에서 ‘기업책임론’을 말했다”고 강조했음에도 기업인들은 달리 해석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의 한 박사는 “기업책임론은 정부에 기대할 것이 없음의 다른 말”이라고 밝혔고 이경삼 사장은 “기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더라도)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은 “현재 한국 경제의 어려움은 지난 20여년간 ‘평등 민주주의’를 가진 정치인들로 인해 잘못된 인식 때문에 빚어진 혼란”이라며 “영국병과 똑같은 현 상황이 정치권의 변화 없인 향후 10년간 이상 지속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상위 30위 기업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이 아닌데도 일괄적으로 상위 30위, 매출 5조원 식의 기준으로 규제를 하니까 기업들이 그 안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다며 좌원장은 “중소기업정책도 모든 기업에 똑같이 돈을 나눠주는 바람에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싹을 잘라버린 꼴이 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잘하는 기업 몇곳만 집중 투자해서 더욱 육성시키고 잘하는 기업이 더 잘하도록 해야 하는데 잘못된 ‘평등주의’로 모두 똑같이 돈 나눠갖고 잘하는 기업이나 못하는 기업이나 성장을 못하도록 하는게 지금의 기업정책”이라고 주장했다.

/ mchan@fnnews.com 한민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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