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시론]‘ID 도용’ 해프닝/원종원 객원논설위원·순천향대 신방과 교수

이연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4.08.05 11:37

수정 2014.11.07 15:43


집단 거주지에 울리는 긴 사이렌 소리. 검은 헬멧에 레이저 총을 든 경찰들은 아파트 입주자들에게 지시에 따라 벽면에 손을 얹으라 명령한다. 일단의 무리가 특수 장비를 통해 신원을 파악해가지만 그러나 주인공은 숫자 몇개를 바꾸는 간단한 속임수로 이들의 포위망을 벗어나고, 엉뚱하게 걸려든 옆집 청년이 무리들에게 끌려나간다.

미래를 소재로 한 영화는 언제나 흥미진진하지만 뤽 베송 감독이 만들었던 97년작 영화 ‘제5원소’는 그중에도 특별한 영화였다. 얽히고설킨 미래사회, 옴짝달싹할 수 없는 프라이버시 상실의 시대에서 사회 규범과 질서의 이단아 브루스 윌리스는 통쾌한 일탈을 통해 관객들에게 ‘숨쉴 여유’를 안겨 준다는 것이 이 영화의 재미다. 물론 관객들은 이것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주인공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갈 수 없는 길은 항상 더 좋아 보인다.


미래사회의 일만 같던 상황들이 요즘 우리 주변에 현실화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낄 때가 많다. 소위 정보사회가 바꾸고 있는 우리 삶의 모습들이다. 근래 병원을 찾은 적이 있는 독자라면 더욱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처방전을 들고 이리저리 수납처를 찾던 풍경은 옛 모습에 불과하다. 접수증을 내밀며 순번을 정해 기다리던 것도, 의사의 휘갈긴 필체 속 처방약을 궁금해하던 일들도 이젠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다. 시내의 한 종합병원에서는 아예 외부의 약국까지 전산망으로 연결해 직접 방문치 않고도 조제약을 주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 놓았다. 물론 원치 않는다면 터치 스크린 작동을 통해 처방전만 출력할 수도 있다. 네트워크와 자동화가 이뤄놓은 촘촘한 정보의 거미줄 덕택이다.

하지만 기술의 진보가 항상 핑크빛은 아니다. 정보사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과거에 만나지 못했던 곤경과 어려움도 커진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려 시스템을 정지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해지고, 해커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정보보호 체계의 구축을 위해 엄청난 규모의 예산이 소요되기도 한다. 부지불식간에 개인 정보를 빼가는 갖가지 악성 코드들로 인해 개인 정보보호 소프트웨어 프로그램들이 필수 장비처럼 여겨지고, MP3나 P2P 등은 산업의 구조 자체를 변화시킨다. 디지털 복제가 용이해지면서 이제 누가 창작에 몰두하겠느냐는 푸념 섞인 불만들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미래 영화의 그것처럼 개인의 정보가 보호받지 못하는 환경의 변화들이다. 본인도 모르는 새 유출된 개인 정보 탓에 직업이나 이름까지 거론하며 날아드는 다이렉트 마케팅 홍보물들과 갖가지 스팸메일은 이제 흔한 일상처럼 되고 말았다. 왜, 어떻게 이런 메일을 받게 되는지 의심스러워하거나 의아해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줄어드는 반면, 미래에 대한 대가요 피하기 힘든 세태의 변화쯤으로 여기는 이들은 점차 늘어가는 추세다. 자연스레 범죄로 생각하거나 프라이버시의 침해로 여기는 사람도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우리의 윤리 의식도 무뎌져 가는 것은 아닐까.

경관 살해범 이학만의 체포를 둘러싼 소위 ‘돈암동 수색작전’이 한 초등생의 주민등록 도용으로 인한 오류로 밝혀져 관계자들을 허탈하게 만들고 있다. 주민등록번호를 수배전단에 넣어 민간에 배포함으로써 수사망을 좁히려던 경찰의 의도가 오히려 수사상 혼란을 초래한 결과를 가져왔다. 무계획한 정보의 노출이 뜻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준 실소를 금할 수 없는 해프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마냥 웃고 넘어가기에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부분이 남아 있다. 개인 정보의 유출이나 보호에 대해 거의 백지 상태로 대비가 없는 우리 사회나 국가 기관의 의식 부재도 그렇거니와 남의 정보를 도용하는 것에 별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우리 청소년들의 윤리 수준은 그야말로 한심하다. 과정이나 동기보다 결과에만 집착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투영된 결과는 아닐까 하는 씁쓰름한 뒷맛도 지울 수 없다.
세상 편해졌다고 넘어가기에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탈윤리, 탈규범, 탈인간화의 경향은 단순한 우려의 수준을 넘어 실제적인 사회문제로까지 성장하고 있다. 시스템도 결국은 인간이 만든, 인간을 위한, 인간의 공간이다.
첨단의 정보 사회에서도 익명성이 보장되는 자유, 프라이버시의 보호는 여전히 중요한 화두로 남아야 함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 jwonpd@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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