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칼럼]이정재와 윤증현/이장규 금융부장

이장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4.08.09 11:39

수정 2014.11.07 15:34


사무실이 같은 여의도에 있는 연고로, 저녁시간에 뜻하지 않게 이정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을 음식점에서 가끔 만나곤 했다. 이 전위원장은 특별한 업무나 행사가 없으면, 맛으론 꽤나 유명하지만 한끼 식사값이래야 몇천원에 불과한 콩국수 집이나 칼국수, 설렁탕 가게에서 주로 직원 1∼2명과 더불어 소박한 저녁을 들었다. 으레 간단한 안주 한 접시에 소주 1∼2병이 반주용으로 구색을 맞추고 있었다.

뜻밖의 조우에 인사를 건네면 반갑게 맞아주며 합석하길 권했고, 그러면 소주 2∼3잔은 반드시 받아 마셔야 했다. 목소리를 내지 않기로 유명한 이 전위원장도 그런 자리에선 재미있게 대화를 풀어가는 이야기 꾼의 면모를 보여줬다.

감독당국의 수장으로 겪는 어려움을 언뜻 비치는 가 하면, 때론 소문난 야구광임을 입증하듯 박찬호의 구위를 걱정했다.
매일 밤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지 밤새 뒤척이다 거실로 쫓겨난(?)일화며, 언론의 앞선 기사로 마음고생한 얘기도 풀어놓았다.

이렇게 조곤조곤 얘기를 잘하는 데 그동안 대외적으로 제 목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을 썼을까… 안쓰러운 생각이 들 정도였다. 권력을 쥔 자의 몸 낮추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겠지만, 하여튼 이 전 위원장은 금융검찰의 수장이 아니라 옆집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목소리 낮추기’에는 이 전 위원장의 감독철학이 담겨있다. 금융산업이 시장기능에 의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금융감독 당국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야 하며, 그래야 자율이 살아난다는 게 이 전 위원장의 철학이었던 것 같다.

지난해 초 금융감독당국 수장으로 취임한 이후 각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의 개별면담 요청과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금감위 관계자는 전했다. 1년5개월동안 가급적 점심�^저녁식사도 직원들과 간단히 때웠다고 한다. 물론 감독당국의 수장이 여론의 흐름을 외면하고 금융현장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감독당국이 튀면 안된다. 있는 듯 없는 듯 물 흐르듯 감독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의 감독철학은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그릇이 비어 있음으로써/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있게 되며 // 문을 내고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 그 방이 텅 비어 있음으로써 / 쓰임이 있게 된다”(제5회 서울국제금융포럼 강연내용중 일부)며 노자의 도덕경을 인용한 대목에서 밑 그림을 읽을수 있다. 인생을 자연의 순리에 맡긴 노자의 무위(無爲)사상을 어떻게 감독정책에 접목하느냐가 그의 고민이 아니었던가싶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장에 의한, 시장을 위한, 시장의 금융감독은 미완의 작품으로 끝났다. 떠나야 할 때 떠나는게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하고 그는 갔지만, 후임자에게 남겨진 과제는 매우 많다. ‘뜨거운 감자’ 금융감독체계 개편서 부터 신용불량자 후속대책, 선진 리스크관리 도입문제, 증권�^자산운용업계의 구조조정, 동북아 금융허브 구축, 방카슈랑스 확대시행 여부 등이 그것이다.

제5대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 윤증현. 그 앞에 놓여진 현안은 산더미같지만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은 윤위원장이라면 모든 문제들을 무난히 해결하리라 낙관하고 있다. 그만큼 거침없는 추진력과 핵심을 파악하는 분석력, 사람을 끌어모으는 보스기질은 주변으로부터 후한 평가를 받고있다. 외환위기 당시 금융정책을 총지휘하는 자리에 있었던 그가 마닐라(ADB·아시아개발은행)로 떠난지 5년이나 지나 다시 복귀하리라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재경부 출신관료들은 ‘언젠가 장관할 사람’이라고 점찍었다고 한다.

그는 이정재 전위원장과는 사뭇 다른 감독정책을 예고했다. “조직이기주의를 용납하지 않겠다. 너무 커서 망하지 않는 관행을 뿌리뽑겠다. 금융사의 자정기능이 약할 경우 감독의 강도를 높이겠다”는 취임사에서 벌써 관료색채가 짙은 시장관치론자의 면모가 느껴진다.


금융감독체계 개편등 챙겨야 할 과제도 적지 않겠지만, 5년만에 돌아온 윤 위원장이 버려야 할 것도 있다. 특히 감독당국이 은행과 기업의 목줄을 쥐고 구조조정을 주도하던 과거 이헌재시절의 향수는 버려야 할 유산이 아닐까. ‘금융회사의 건전성확보, 공정한 금융거래 확립, 금융소비자 보호’는 누가 수장이 되든 반드시 이뤄야 할 지상과제이며, 이는 관치가 아니라 시장을 통해서만 달성가능하다.
관료들이 좋아하는 윤증현이 아니라 시장이 좋아하는 윤 위원장이 되길 기대해본다.

/ jklee@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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