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칼럼]‘부자가 앞서면 나머지는 따라간다’/방원석 논설위원

방원석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4.08.10 11:39

수정 2014.11.07 15:31


이런 질문을 해보자. 분당·일산 같은 신도시에서 1시간 남짓 걸려 서울 도심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의 삶의 질이 과거보다 좋아졌다고 할 수 있는가. 첨단휴대폰과 MP3 등을 자녀에게 사주기 위해 부모는 얼마나 수입을 올려야 하는가. 일본을 보자. 국민소득 3만5000달러, 세계 최고 수준의 부를 자랑하지만 개인생활은 빠듯하다. 이들도 대부분 우리처럼 1∼2시간 거리에서 출퇴근하고 양복 한두벌로 한철을 지낸다. 성장의 혜택을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장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수입이 적은 대신 지출도 적었다. 나름대로 세상사는 여유도 있었다.
세상이 발전한다는 것은 성장이고, 성장은 돈이 그 척도여서 갈수록 세상살이가 각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역사가 발전하고, 글로벌 경쟁체제를 갖추고, 여러 사람이 함께 먹고 살려면 경제가 좋아야 한다. 그러려면 성장은 불가피하다.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이끈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은 이런 의미에서 선구자적이다. ‘부자들이 앞서가면 나머지는 따라간다’는 선부론은 중국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이론적 토대다. 요즘 우리의 ‘반부자정서’와는 딴판이다. 마오쩌뚱이 공산당을 세운 후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토지개혁이다. 땅을 국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준 것이다. 그런데 잘사는 사람은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못사는 자본주의식 병폐가 되살아났다. 능력에 따라 생산성에 차가 난 것이다. 안되겠다 싶어 이번엔 토지를 몰수하고 다시 집단농장을 설립했다. 그 결과 생산성은 현저히 떨어지고 말았다. 그후 덩사오핑이 집권하면서 등장한 것이 선부론의 시장경제다. 이것이 오늘날 중국 번영의 동력이 되었음은 두말할필요가 없다.

성장의 그늘은 소외와 부패다. 성장도 소외계층을 달래가면서 해야 한다. 그래서 성장 후 분배는 중요하다. 경제학의 분배이론중 ‘허시먼의 터널효과’라는 게 있다. 선진국에 이르는 과정을 ‘2차로 터널’에 비유한것이다. 2개 차로 가운데 하나에서 차량이 움직이면 다른 차로의 운전자는 자기도 곧 움직일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런데 자기 차로의 정체가 계속되면서 불만이 쌓여 교통경찰을 불신하게 되고, 급기야 차로 위반을 하게 된다. 결국 혼란으로 인해 터널 안의 모든 차들은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분배가 불균등해지면 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된 계층이 정부를 불신하고 위법행동을 하게 되어 성장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는것이다. 결국 함께 망한다는 이론이다.

이런 분배도 성장 속에서나 가능하다는 게 딜레마요, 패러독스다. 요즘 우리의 성장불균형은 심각하다. 소득 최상위계층 10%의 평균소득을 최하위계층 10%의 평균소득으로 나눈 이른바 ‘소득 10분위 배율’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분배구조가 악화되고 있는것이다. 이는 성장이 제대로 안되고 있기 때문인데, ‘성장과 분배는 함께 간다’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다. 경기가 추락하면 고소득층보다 일자리가 먼저 없어지는 저소득층에게 그 피해가 돌아간다. 그야말로 성장이 없으면 분배고 뭐고 없다는 뜻이다.

싱가포르로 눈을 돌려보자. 리콴유 총리에 이어 아들 리셴룽 부총리가 대를 이어 39년간 ‘일당(국민행동당) 독재’를 하고 있는데 국민적 지지가 아직도 열화와 같다. 야당은 있지만 존재는 미미하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 집권세력의 경제성적표다. 1인당 국민소득 2만7000달러로 세계 수준급인데, 국민들은 이를 집권세력의 공이라고 생각한다. 이 나라 국민들은 “소득수준을 높여주면 계속 권력을 보장하겠다”는 식이다. 국민과 정권이 경제성장을 놓고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래도 자가용시대에 살면서 자식유학시키고, 해외여행의 여유까지 생긴 것도 따지고 보면 성장 덕분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의 몰락으로 극빈층이 넓어지는 ‘남미병’을 앓고 있다. 극빈층은 또다른 극빈층을 부른다.
당연히 분배욕구는 흘러넘칠 수밖에 없으니 그게 걱정이다. 10년 가까이 국민소득 1만달러에 묶여 있어 분배다 뭐다 할 여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거지끼리 보자기 �d는’격이다. 국민소득을 묶어 놓는 정권은 엄히 심판하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정부는 장기집권을 보장하는 싱가포르 같은 국민적 판단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때가 온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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