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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의 책돋보기-로빈슨 크루소]유럽 중심의 경제 가치관 엿보여

노정용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4.08.19 11:46

수정 2014.11.07 15:07


다니엘 디포우(1660∼1731)는 청교도 정육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목사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처음 택한 길은 사회적으로 마이너였으며 박해받던 자신의 믿음을 설파하는 목사의 길이 아니라 자신들을 박해하는 왕정을 혁파하려는 시도였다. 처음부터 가망이 없던 싸움에 보기 좋게 패배한 디포는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자본주의적 시장질서에서 주류(主流)에의 편입을 시도하지만, 도리어 그에겐 파산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만다.

청교도인 디포우에게 채무는 곧 하느님에 대한 죄의 개념과 동일시 되었고, 그 죄과를 씻기위해서 평생 지칠줄 모르는 무모한 반항과 투쟁을 계속하게 된다. 그 덕에 디포우는 파산한 기업가로, �v기는 언론인으로, 고독한 첩자로, 실패한 정치 선동가로 여전히 마이너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빚더미에 앉아 있던 59세의 디포우가 집필한 당대의 컬트 소설 ‘로빈슨 크루소’(1719)가 없었다면 후대인들은 디포우가 틈틈이 500편이 넘는 글을 쓴 작가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요크의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은 스코틀랜드의 한 선원의 무인도표류기에 영감을 받아서 집필되었다고 하지만, 파산 선고라는 인생항로에서 난파하여 비밀첩자라는 고립무원의 일상사를 영위하면서도 여전히 청교도 특유의 불굴의 노동윤리를 버리지 않았던 디포우 본인의 경험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로빈슨 크루소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확천금을 꿈꾸며 모험 항해에 나선다. 끝없이 펼쳐지는 망망대해는 로빈슨의 무절제와 무계획성을 보여주며, 자신의 삶에 자족하라는 신의 계명을 무시한 것이기도 하다. 홀로 무인도에 표류하여 자신의 오만에 대한 회개의 기도와 일기를 적어가면서 로빈슨은 창의와 연구, 그리고 근면과 노력으로 착실한 무인도 생활을 설계해 나간다. 또한 원주민 프라이데이를 구출하여 충실한 하인으로 삼고, 마지막에는 무인도에 기착한 영국의 반란선을 진압하여 선장을 구출, 28년 2개월 19일간의 무인도 생활을 접고 고국에 돌아오게 된다는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우화로서 자연에 대한 서구 식민주의 문명의 승리를 가장 이상적으로 그려내는 현대의 신화가 되었다.


전세계의 어린이들에게 여전히 진취적인 용기, 독립심, 개척정신, 청교도적 금욕주의, 경제적 인간상의 상징으로 별다른 거부감없이 읽혀지는 로빈슨 크루소에는 유럽인의 일방적인 가치관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무인도를 일궈 경작지를 얻어내고, 원주민을 문명인으로 ‘교화’ 시키는 로빈슨 크루소는 전세계를 떠돌면 식민지를 개척하고 원주민들에게 자신들의 가치체계를 강요하던 유럽인들의 전형이다. 절해의 고도에 대영제국의 가치체계를 복원하려는 로빈슨 크루소의 시도는 수백년 동안 그가 오로지 백인이며 기독교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럽중심주의가 지닌 타자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출발하여 프랑스의 미셀 투르니에는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를 로빈슨의 원주민 하인 프라이데이의 시각에서 다시 재구성하기도 하였다.

/영룡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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