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2005 신년기획-은행 대형화 이후 과제]내실 경영이 글로벌 금융허브 꽃피운다

이민종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4.12.30 12:19

수정 2014.11.07 11:02


1980년대 미국을 시발로, 1990년대 일본,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국가에 은행합병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쳤다. 한국 금융산업 역시 외환위기이후 이같은 조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부침의 정도가 가장 심했다.

인수·합병(M&A)을 통한 1차 부실은행 정리, 2차 은행합병으로 수십여개의 은행이 짝짓기 바람에 휘말렸으며, 지금도 3차 은행합병 조짐을 읽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바람의 핵심에는 칼라일, 뉴브릿지, 골드만삭스, ING 등 외국자본이 예외없이 자리잡고 있다. 올해들어서도 씨티가 한미은행을 인수해 은행대전의 서막을 열었다.
또 제일은행을 인수하기 위해 HSBC(홍콩상하이은행), 스탠다드차타드(SCB)가 막판 경합을 벌이고 있다.

이런 열풍 속에서 은행 합병으로 인한 대형화·겸업화가 과연 한국의 금융산업을 한단계 도약시킬 것인지, 부작용만 야기할 ‘신기루’에 그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덩치커진 공룡은행들…닻오른 대형화=외환위기이후 정부는 종금사를 포함한 금융기관 폐쇄조치를 내린데 이어 M&A를 통해 부실은행을 정리했다. 대동은행은 국민, 동화는 신한, 충청은 하나, 장기신용은 국민은행에 각각 인수됐다. 상업과 한일도 합쳐졌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부실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주택과 국민, 서울과 하나은행이 2001, 2002년에 각각 합병됐다.

이같은 금융구조조정은 경쟁촉진보다는 은행의 대형화를 통해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꾀하는 방향으로 정책방향이 설정됐기 때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김현욱 연구위원은 ‘은행의 대형화와 은행부실위험’ 보고서를 통해 “1980∼1990년대 나타났던 은행수 급증, 수신고 및 국내외 점포망 확대 등 외형성장 경쟁으로 인한 ‘오버뱅킹’(Overbanking)이 은행산업의 구조적 취약요인으로 진단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자연스레 부실은행은 퇴출되고, 은행수는 줄어든 대신 합병 및 금융지주회사의 설립 촉진으로 대형화는 가속화됐다. 1998년말 기준으로 21개였던 은행 수는 2002년말 14개로 줄어들었지만 평균자산규모는 18조9000억원에서 40조6000억원 수준으로 증가했다. 은행별 총여신도 평균역시 98년말 13조7000억원에서 33조2000억원으로 늘어났다.

◇정책에 떠밀린 합병, 효과 아직 ‘미미’=은행합병에 따른 긍정적 기대효과는 뭘까. 우선 도산위험 축소, 다양한 상품을 통한 시장 지배력 강화, 정보기술(IT)비용 절감, 자금조달비용 감소, 규제 회피 등이 꼽힌다.

금융연구원 한상일 연구위원은 “세계 금융산업은 IT기술의 발전, 고객수요의 다양화, 규제완화 등의 영향으로 대형화, 겸업화, 증권화, 금융혁신의 변화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합병을 통한 대형화는 포트폴리오 관리에 기반을 둔 거래형 금융의 흐름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외환위기이후 진행된 금융개혁과 금융구조조정이 대내외 투자자의 신뢰도 향상과 금융불안 요인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합병 효과가 ‘체감 단계’가 아니란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합병이 우선 대외신인도제고 및 국제경쟁력 강화라는 조류에 떠밀려 정책적 강제성을 띄었고, 합병이후 경영구조조정도 만족할 수준에서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한연구위원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 국민, 하나은행 등 주요 시중은행들의 경우 합병이후 비용절감 측면에서 시너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나타났다. 국민, 우리, 하나은행 등 주요 합병은행의 인건비가 판매 및 관리비(판관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전반적으로 개선되지 않은 것이다.

인력관리도 사정은 마찬가지. 구조조정으로 고용인력은 줄였지만 노동생산성은 향상되지 못했다. 이덕훈 금융통화위원은 ‘금융전문인력양성’ 세미나에서 ▲구조조정을 통한 비용 감축 효과 부진 ▲인적자본을 기반으로 한 생산성 향상 개선 부족 ▲금융산업의 안정성 미확보 ▲수익구조 취약 등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쏠림’이나 중기대출에서 알 수 있듯 수익성 확보와 건전성 중심의 새로운 경영패턴이 야기한 문제들이 경영위험을 가중시키고, 시장불안의 잠재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란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신용위험관리·감독 책임 강화 등 보완책 시급=정부 소유지분은행의 매각은 유일한 ‘토종자본의 보루’로 꼽히는 우리금융을 일단 2년 뒤로 미루는 것을 시작으로 ‘숨고르기’에 들어간 형국이다.

여기에 최근 외국투기자본의 국내 금융시장 교란 문제가 부상하면서 동시에 대형화에 따른 회의적 시각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감독당국내부에서 조차 ‘덩치를 키워 놓으니 금융기관의 통제가 어렵다’는 느낌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은행의 대형화·겸업화를 보는 시각은 사실 외부에서 더 심각하다. 미국 금융학자인 게리 딤스키 교수는 “한국 은행산업은 막대한 공적자금 투입에도 불구, 제대로 된 은행이 출현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외국자본의 진출은 단기성, 투기성이 농후한 자본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의 경우 지난 10년간 은행산업의 집중도가 급속도로 높아졌는데 전통적인 대출 비지니스로 부터 투자은행업, 자산관리업 분야로의 다변화는 결코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소개했다. 한국은 앞으로 씨티은행의 진출로 촉발된 은행간 경쟁이 한층 대형화에 목을 매고, 효율성 목표 달성으로 내몰면서 인원조정, 복지축소, 고용 파괴 등의 연쇄적 부정효과를 낳을 것이라는게 딤스키 교수의 판단이다.

만약 대형화·겸업화를 추세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면 여러 ‘안전장치’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대형화된 금융기관의 자발적 위험관리 유도, 감독의 책임성 강화, 시장의 감시기능의 원활한 작동, 공시제도의 강화 등이 그것이다.

금융연구원 한연구위원은 “대형화가 부정효과만 있다고 보기 어려우나 포트폴리오 매니지먼트 차원에서 국내은행의 대응능력이 아직까지 취약하다”면서 “카드사태만 해도 리스크 관리능력의 약한 면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한연구위원은 또 “대형화에 따라 리스크가 집중되므로 감독당국에서도 훨씬 정교한 모니터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lmj@fnnews.com 이민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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