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치일반

[시장·도지사에 듣는다-손학규 지사]“어떤 일을 하는지 지켜봐 달라”

김두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5.04.18 12:51

수정 2014.11.07 19:11



손학규. 사람들은 그를 ‘긴급조치’세대로 분류한다. 서슬 퍼렇던 유신시절 그는 서울대 정치학과에 재학중이었다. 그때는 바로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한창이었는데 갓 스물이 된 이 청년이 주목을 받게 된다.

서클실에서 신입생이던 그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3박4일간 단식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기회로 그는 인권변호사 고 조영래씨와 상대를 다니던 김근태 복지부 장관과 함께 운동권 삼총사로 불리게 된다.

그는 10남매중 막내로 1947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교직에 몸담고 있었기에 비교적 원만한 가정환경속에서 자랐다. 양친은 손지사에게 교편생활을 권유했을 정도로 자기 직업에 자부심을 느꼈다.

민주화운동과 관련, 여러 번 고문을 받고 1년 넘게 옥살이도 했다. 4학년 때 군에 입대, 전방에서 35개월간 복무, 육군병장으로 제대했다. 제대도 하고 졸업도 한 그는 소설가 황석영씨와 자취하면서 구로공단에서 공장생활도 하고 청계천 판자촌에서 빈민들과 생활하기도 했다. 노동�^빈민운동을 모두 한 셈이다. 그는 이 운동을 하면서 수배자가 돼 막노동은 물론 철공소에서는 용접일도 했다. 국회의원과 고위관료 중에 용접기술을 가진 이는 그가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그런 후에 80년 ‘서울의 봄’이 온다. 그때 홀연 영국교회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서울의 봄이 광주사태로 짓밟히고 만다. 군사 폭정이 계속되자 그는 유학 중에도 잠시 귀국, ‘우리의 딸, 권양’을 발간해 민주화운동을 촉발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유학을 마치고 대학 3학년 때 만난 약사 출신 부인과 결혼,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그후 인하대와 서강대에서 정치학교수로 강단에 서게 된다. 그러던 그가 93년 광명에서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내가 무엇이 되는지를 보지 말고,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를 지켜봐 달라”며 강단을 떠난다.

/ dikim@fnnews.com 김두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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