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원석칼럼]‘경제독립’ 그때까지/논설실장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5.04.27 13:01

수정 2014.11.07 18:53


삼성그룹을 창업한 이병철의 ‘도쿄구상’(東京構想)은 재계에서 전해오는 유 명한 일화다. 이병철이 매년 정초를 일본 도쿄에서 지냈다고 해서 세간에서 이를 두고 도쿄구상이라고 불렀는데 그가 중년시절인 지난59년부터 이곳에서 휴식을 즐기며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도쿄는 요즘말로 하면 동북아의 ‘정보허브’였다. 우리나라에서 우선 가깝고 세계적인 국제도시로서 정보 집산지의 역할을 했다. 세계정치와 경제 의 흐름을 보고 듣기 위해서는 도쿄가 아시아에서는 단연 첫손가락에 꼽힌 것 이다. 이병철의 도쿄구상이 수십년간 이어지며 삼성은 도쿄를 반도체, 유전공 학, 제트항공기에 이르는 하이테크 사업의 꿈을 실현하는 전진기지로서 삼았 다.
그가 일본이란 창구를 통해 세계와 미래를 통찰하며 각종 사업을 구상해 온 것이다. 이병철이 요즘 이런 행각을 했더라면 아마도 친일파로 매도됐을지 도 모를 일이다.

지난 80년대초 삼성이 전자, 반도체 등 첨단산업에 참여할 당시의 일화를 보 면 일본이 우리에 얼마나 거드름을 피우고 교묘한 방법으로 기술 이전을 방해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흔한 VTR 제조기술조차 가르쳐주지 않았다는게 후 일담이다. 삼성이 우여곡절 끝에 반도체 기술제휴를 했던 일본의 한 전자회 사 임원은 일본 국내에서 ‘국적(國賊)’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니 말이다.

80년대 들어 삼성의 반도체사업은 급속한 발전을 거둬 일본을 따라잡기 시작 했고 20년이 지난 요즘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불과 10여년까지 삼성의 전자 제품들이 미국 등 외국 일류 백화점에서 소니, 파나소닉 등 일본제에 밀려 온 갖 홀대를 당했던 시절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지개벽에 가깝다.

그래서 삼성은 이제 반도체 승리를 발판으로 전자쪽에서는 극일에 성공했다 는 평가도 나온다. 삼성의 스승 기업이던 천하의 소니가 삼성에 추월당하고 지금은 정보기술(IT)쪽에서는 삼성의 노하우를 배우고 있다. 이병철이 호랑 이 굴에 들어가 드디어 호랑이를 잡고만 격인데 그것이 50년의 세월이 걸렸 다. 그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것이다.

하지만 자만은 금물이다. 일본은 여전히 건재하고 우리와의 국력의 차는 엄 연히 존재한다. 심지어 일부 극소수지만 일본인들은 삼성을 우리 기업으로 생 각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삼성은 일본 기업의 장점과 강점을 철저 히 자기 것으로 만든 기업이며 삼성은 일본이란 모체와 탯줄로 연결돼 있다 는 생각이다.

정말 우리도 할말없게 돼 있다. 핵심부품과 장비를 일본에 의존해온 나머지 지금까지 일본에 기술 종속을 불러오지 않았는가. 결국 일본의 품안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산업 숙명론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기술과 자본 종속에서 벗어나 야 진정한 ‘독립’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천문학적인 교역의 누적 적자가 수십년간 지속되고 일본의 원천기술 없이 우리네 공장이 돌지 않는 구조에서 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자본까지 신세를 많이 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아직은 우리가 홀로 설 수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일본의 국가 브랜드는 여전히 세계무대에서 막강하다. 올림픽과 월드 컵을 개최한 나라, 세계경제규모 11위 나라, 한류열풍으로 아시아를 주도하 는 나라로 우리가 성장했지만 국가브랜드는 아직 빈약하다. 독도가 ‘일본 해’에 속해 있다는 일본의 국가 홍보전략에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 는 판국이니 말이다.

사실 우리는 산업화 과정에서 일본 덕을 많이 봤다. 자동차, 철강, 조선에서 부터 하다못해 라면 등의 사소한 식품까지 일본을 철저히 베끼고 배운 것이 다. 무엇 하나 우리가 독창적으로 개발하고 이뤄놓은게 없다. 다만 요즘 우리 가 정보기술쪽에서 큰소리 내고 있는데 ‘우리가 일본을 이겼다’는 자신감 은 삼성전자의 경이로운 실적에 잠시 도취돼 나온 착시 현상일뿐이다.


우리는 지금 이병철이 일본에서 기술을 도입할 시절처럼 자세를 낮추면서 배 웠던 지혜와 인내, 오기를 좀 더 배워야 한다. 반일 감정보다 극일의 지혜와 전략을 찾아야 하는것이다.
아마도 이병철이 당시 ‘친일파’가 되지않고 독 불장군이나 독일병정처럼 행동했더라면 그나마 요즘 삼성이 일본과의 ‘국지 전’에서 승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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