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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블레어의 ‘신분증’모험/안병억 런던 특파원

김성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5.06.02 13:06

수정 2014.11.07 17:54



영국이 신분증 도입 법안을 두고 논란을 벌이고 있다. 영국은 독일이나 프랑스 등 대륙에 있는 유럽국가와 달리 우리식의 주민등록증이 없다. 운전면허증이나 여권이 신분증을 대신한다.

그런데 지난달 3기 집권에 성공한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신분증 도입 법안을 다시 의회에 상정했다. 총선 전 의회에서 논의하다가 반대가 있자 총선 이후로 미뤘다가 새로 구성된 의회에 다시 제출한 것이다.

법안은 오는 2013년까지 의무적으로 첨단 신분증을 도입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눈동자와 얼굴, 지문 등 생체 정보를 포함한 신분증 겸 여권을 도입하고 관련 신상정보를 전산 처리한다. 영국에 3개월 이상 거주하는 비유럽연합(EU) 국민과 EU 국민이 우선 이 신분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자국민은 여권 갱신자를 대상으로 새 신분증으로 교체해준다. 이어 오는 2013년까지 16세 이상의 모든 국민이 새 신분증을 갖게 된다. 신분증을 의무적으로 휴대하게 될지는 차후 의회 표결을 통해 결정된다.

이 법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다. 인권 침해 여부와 막대한 경제적·사회적 비용이 주된 이유다.

정부는 부당한 방법으로 사회복지 혜택을 받는 사례를 막을 수 있고 범죄 예방에 효과적이라는 이유로 신분증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인권단체들은 개인 신상 정보를 전산 처리해 정부기관끼리 공유하면 사생활이 침해당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기존 여권이나 운전면허증으로도 얼마든지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이들은 신분증이 있는 스페인에서 지난 2003년 기차 폭탄 테러 사건이 일어난 일을 예로 든다.

사회적 비용도 거론하고 있다. 정부가 개인 생활을 감시한다는 느낌을 받게 돼 국민과 정부간 신뢰가 훼손된다는 주장이다.

신분증 도입에 따른 막대한 비용도 제기된다. 신분증을 발급받으려면 93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18만원을 내야 한다. 여권 발급 비용보다 2배 정도 더 많은 돈을 국민이 부담해야 한다. 또 각 지역에 첨단 신분증 발급과 판독에 필요한 장비를 설치, 운영하고 전산장비를 설치하는데 큰 비용이 들어간다. 여기에 얼마가 들어갈지는 파악조차 어려워 정부는 구체적인 비용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당초 오는 2013년까지 31억파운드, 6조원 정도가 들 것으로 예상됐으나 최근에는 58억파운드, 12조원 정도로 추산될 뿐이다.

블레어 정부는 왜 이처럼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신분증 도입을 서두르고 있는가. 정부는 미국의 개정된 여권 규정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자국을 방문하는 여행자의 경우 생체정보가 담긴 여권과 비자를 요구하고 있다. 또 EU 회원국도 생체정보를 담은 여권 사용을 의무화하고 있다.

그러나 여당인 노동당에도 이 법안에 반대하는 의원이 현재 적게는 20여명에서 많게는 80명까지 있다. 제1 야당 보수당은 비용을, 제2 야당 자유민주당은 인권을 이유로 새 신분증 도입에 반대하고 있다.

총선 전 이 법안이 의회에 상정됐을 때 1차 표결에서 노동당 의원 가운데 19명이 반대했다. 블레어 총리는 총선 공약에서 첨단 신분증 도입을 적극 강조했다. 전통적으로 노동당이 범죄 대처에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또 노동당은 지난 의회와 비교할 때 100석 정도가 줄어든 67석의 과반수를 유지하고 있어 조기에 법안 통과를 시도하고 있다. 의료보험과 공교육 개선 등 다른 우선 순위에 밀리기 전에 무엇인가 했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다.

그러나 필자와 대화를 나눈 몇몇 영국인들은 이 법안에 극도의 불쾌감을 보였다. 우리식으로 길에서 경찰이 신분증 검사를 한다는 것은 이곳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역사적 배경과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분증 없는 영국사회는 정부기관의 감시나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정부 계획대로 첨단 신분증을 도입하면 사생활이 거의 보호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크다.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 조지 오웰은 ‘1984년’에서 독재자 ‘빅 브러더’가 시민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사회를 실감나게 그렸다.
의회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는 영국이 과연 신분증 도입 법안을 어떻게 처리할지 주목된다.

/ anpye@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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