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시론]기업지배구조 논쟁과 사색당쟁/이상묵 삼성금융연구소 정책연구실장

홍창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5.11.09 13:53

수정 2014.11.07 12:22



사학자 이덕일씨가 지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라는 책에는 임진왜란 이후 왕이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잃어 왕권이 약화된 상황에서 사대부층이 권력을 탈취하고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암투가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이른바 사색당쟁이다.

그 책에 의하면 사색당쟁이 겉으로는 거창한 이념논쟁인 것처럼 포장돼 있으나 사실은 권력을 탈취하고 유지하기 위한 추한 놀음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왕이 죽었을 때 또 대비가 죽었을 때 몇 년 상으로 하고 또 복식은 어떻게 하는 것이 주자의 말씀에 맞는 것인지를 놓고 서로 다투고 공격했다고 한다. 그러한 다툼의 와중에서 왕이 독살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사대부들이 그러한 놀음을 하는 동안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지고 국력이 쇠락했다.
그리고 결국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백성을 노예로 전락시켰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기업지배구조 논의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사색당쟁과 유사하다.

우선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과 실제 속셈이 다르다는 점이 너무나 유사하다. 금산분리나 기업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이론적이고 학구적인 논의를 앞세우고 있으나 그 실질은 규모가 큰 기업집단은 사기업이 아니라 공기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기업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으나 큰 기업은 사회가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적 기능이 크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은행의 경영권마저 외국계 투기자본에 선뜻 넘겨주는 나라에서 주인이 엄연히 존재하는 사기업의 경영권을 공익 견지에서 사회가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둘째로 유사한 점은 정작 사상이 발원한 나라에서는 실사구시적으로 그 사상을 해석하는데 비해 그 사상을 수입해온 우리나라에서는 자구에 얽매이는 교조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리학이 정작 발원지인 중국에서는 큰 호응을 받지 못했던 반면 성리학을 수입한 우리나라에서는 성리학서의 자구 해석을 목숨 걸 정도로 교조적으로 추구했다.

금산분리의 발원지인 미국에서는 금산분리를 은행과 산업간 분리 정도로 운용하고 있다. 영어로 금산분리가 ‘Separation of Banking and Commerce’인 것은 그 이유에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미국에서는 규제 대상 금융업으로도 취급하지 않는 카드업에까지 금산분리를 거론한다. 진입과 퇴출의 자유가 시장경제의 기본원리인데도 특정한 주체의 금융업 진입을 제한하는 금산분리가 시장경제의 기본원리라는 주장마저 제기되고 있다.

지배구조론의 발원지인 영미 국가에서는 지배구조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시장에서 형성되는 구조를 가급적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차등의결권 주식을 허용하는가 하면 상호출자에 대해서도 관대하다. 지배구조는 주주들간의 문제인데 주주들이 그 사실을 알고도 선택한 것이라면 가급적 존중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수직 관계로 정렬된 지주회사 체제가 이상적인 지배구조라는 정체불명의 학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그 학설에 어긋나는 논의는 사문난적으로 배척하고 있다.
기업의 성과를 향상시키는 것이 지배구조 논의의 목적인데도 주객이 전도돼 경영 성과가 손상되는 한이 있더라도 정통성 있는 지배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색당쟁과 기업지배구조 논쟁의 또다른 유사점은 땀 흘려 생산하는 사람들의 말은 선비의 높은 뜻을 모르는 천박한 장사치의 말로 취급되고 기식하는 선비계층의 공리공담적 논쟁의 와중에 백성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들고 있다는 점이다.


실패한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도 귀담아들을 말이 있다면 ‘먹물들은 주기적으로 생산 현장에서 땀을 체험하게 해야 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깊어가는 우울한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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