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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의 책돋보기-허먼 멜빌의 ‘모비딕’]19세기 포경으로 표현한 자연의 경이감

노정용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5.11.23 13:54

수정 2014.11.07 12:02



허먼 멜빌(1819∼1891)의 ‘모비딕’을 읽는 독자는 이 소설이 과시하는 고래와 고래잡이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에 혀를 내두른다. 거기에는 고래의 종류와 생태, 습성에 대한 섬세한 탐구뿐 아니라 포경의 장비, 방법, 역사 및 고래기름의 정제과정에 이르는 상세한 설명이 한없이 계속된다.

한때 남방해에서 포경선을 탄 이색경력의 소유자인 멜빌이 고래와 고래잡이에 대해서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상에 대한 집착은 눈앞의 현실을 가능한한 정확하게 포착하려는 리얼리스트적 야망의 표출이기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도하게 세밀화된 대상묘사는 전체적 조망의 상실을 열거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삶의 무료함’에서 포경선 피쿼드호에 승선한 화자 이스마엘의 집요하고 열정적인 기억의 재구성은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는 삶의 애매성과 불투명성을 세밀화된 묘사들 속에서 해체하고 재구성하고 있다는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화자 이스마엘은 무엇인가를 계속 추구하는 자다. ‘고래의 흰색’에 매료되어 고래잡이배를 타고 고래와 포경에 대한 박물학적인 지식을 섭렵하면서 눈앞에 보여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집요한 시선을 저버리지 못하는 이스마엘에게서 더이상 경험을 공유하기 어려운 시대의 근대적 화자의 모습이 반세기쯤 앞서 희미한 모습을 드리우고 있다.
화자에게는 여전히 미지의 경이감으로 남게되는 ‘모비딕’을 평생 뒤�v고 있는 선장 아합의 집요함은 과거의 기억을 현재적으로 항상 정당화시켜야만 그 임무를 다했던 석화된, 전근대적 화자의 또다른 자아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따라서 미지와 경이로움의 대상인 ‘모비딕’은 어떠한 포경 작살의 공격에도 끄떡없다. 아합 선장과 선원들과 포경선 피쿼드호는 도리어 수장되고, 유일한 생존자는 이야기꾼이 된다.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그 어떤 힘에 이끌려서 일종의 파국을 향해서, 즉 모비딕을 찾아 나서는 일을 중단할수 없게 되어버리는 상황들이 이 19세기 미국문학의 고전을 여전히 현대적이게 하는 기능이었으며, 멜빌이 천착하는 삶은 근본적으로 다의적으로 해석되어지는 세계였던 듯하다. 주인공들을 둘러싼 인간관계의 다중성 및 민주주의적 알레고리 또한 이 소설을 읽는 재미를 배가시켜주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출간과 동시에 독자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던 이 복잡장대한 소설이 1920년대 다시금 세인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점은 화자가 토로하는 바와 같이 ‘세심한 무질서’ 속에 툭툭 던져진 이야기들의 자연스러운 덧붙임이다.


총135장에 이르는 방대한 소설 내용들의 느슨한 시간적 짜임이 ‘이스마엘의 거대한 상징적 산문시’로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모비딕’을 제대로 읽어본 독자는 별로 없을지언정 현대인의 문화적 기억속에 여전히 하얀 거품을 품어내고 유유히 물길을 가르는 모비딕의 모습은 이미 신화적 위치를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김영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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