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정해종의 아프리카 미술 산책]기도할때 앞을 바라보듯‘절대적 신’에 대한 갈구

조용성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6.01.10 14:14

수정 2014.11.07 00:41



서구의 학계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연구와 보고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초기의 그런 연구들은 존재 자체를 보고하는 수준의 것들이 대부분이며, 해석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주관적인 경향들을 띠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냥 저 혼자 좋아서 아프리카의 미술품들을 찾아다니고 자료를 수집해 온 필자로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상식으로 여겨지고 있는 수준에서 그것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 수준으로 바라보아도 오히려 난해한 건, 아프리카의 미술이 아니라 개념을 비틀거나 깨뜨리고 다시 만들어내는 서구의 현대미술 쪽이다.

그냥 평범한 아프리카의 인물 조각상이 하나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치자. 뭐, 그게 세누포 족의 기마상이어도 좋고, 발루바 족의 선조 조각상, 혹은 도곤 족의 물신상이어도 좋다. 다만 아프리카 전통의 기반 위에서 만들어진 조각상을 어떤 고정관념의 방해도 받지 않고 유심히 쳐다본다고 치자.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전에 보아왔던 작품들과 견주어 그것들이 모두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조각들이 하나같이 다른 어떤 것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조각을 바라보고 있는 당신, 또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조금 더 세밀하게 관찰한다면 그것들이 모두 정확한 인체비례에서 어긋나 있다는 것과 그들 중 많은 경우가 좌우대칭을 이룬다는 것 또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리가 교과서나 교양서적들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그리스 시대의 조각들을 떠올려보자. 밀로의 비너스 상, 아니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라고 해도 좋다. 둘 다 공교롭게도 한쪽 무릎이 약간 굽혀져 자세가 약간씩 삐딱하다. 비너스는 정면에서 고개를 15도 가량 오른쪽으로 틀어져 있고, 다비드는 아예 옆을 바라보고 있다. 비너스의 하반신을 감고 있는 천에는 그 주름 하나하나까지 표현되어 있고, 다비드 상에는 근육의 움직임들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심지어는 포경상태의 거시기(?)까지. 그렇다면 이 차이는 무얼 말하는 걸까.

그 차이에는 아마 서로 다른 환경과 문화, 종교관이 깊게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로운 친화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데 비해 아프리카는 대립적인 길항관계에 있다든지, 따라서 아프리카에는 전지전능한 신들이 우글거리고, 그리스에서는 신마저도 인간의 모습으로 전락시켜 왔다든지. 그러한 맥락에서 그리스에선 민주주의와 자연주의가 발전하고 아프리카에선 추상과 상징이 발달해 왔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예술의 본질에 대해 여러 견해들이 있고 정답 또한 없다고 보아야 옳다. 정제되지 않은 나의 생각들을 전제로 말하자면 예술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보낸 신의 선물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은 지상의 인간들이 천상의 경지를 모방하거나, 삶 속에서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에 가깝다. 아프리카 미술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에게 ‘예술을 위한 예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그들의 예술이 철저하게 삶 속에서 빚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설득력을 갖는다. 그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는 무엇보다 자연과 질병을 극복하고 식량을 해결하는 문제가 중요했으리라. 지난하고도 긴 이 싸움에서 많은 신들이 탄생했을 것이고, 그들은 신을 통해 위안을 받고 힘을 얻었을 것이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들을 찾았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술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리스 조각상들이 얼굴이 삐딱하다는 것은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인간들의 상황이나 어떤 국면들을 바라봄, 즉 인간들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일 것이다. 반면 아프리카의 조각상들이 뚫어지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건, 바로 고단한 현실적 삶의 공간을 넘어 초자연적이고 절대적인 신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와 욕망의 반영이거나, 신 또는 조상의 거룩한 손길이 조각에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찰이나 교회에서 절대적이고 신성한 존재를 마주 대할 때, 옆을 힐끔거리지 않고 항상 정면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스러움은 항상 정면으로 오는 것이다.


/터치아프리카 대표·시인

touchafrica@hanmail.net

(이 글은 www.baobabians.net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사진설명=서구의 대표적 조각 다비드상(오른쪽)은 무릎을 굽히고 옆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아프리카 조각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으며 좌우대칭이다.
이는 아프리카인들의 초자연적이고 절대적인 신의 세계에 이르려는 의지와 욕망의 반영으로 해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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