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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종의 아프리카 미술 산책]유아 인체비례와 비슷 번성과 풍요 비는 의미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6.01.17 14:16

수정 2014.11.07 00:32



아프리카 조각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은 전체적인 인체의 비례가 안 맞으며 심지어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포즈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대개의 조각은 가분수다. 머리와 몸통이 다른 부분에 비해 크게 만들어져 있는데 비해 다리는 상대적으로 매우 짧으며 하나같이 무릎이 굽혀져 있다. 이러한 비례는 도무지 정상적인 성인의 인체라고 볼 수가 없으며, 오히려 유아기의 인체비례에 가깝다. 더구나 그 조각에는 조상의 영험함이 깃들어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아프리카 조각은 하나같이 이러한 비례를 채택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조상 숭배의 주된 목적이 종족의 번성과 풍요를 비는 데 있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는 한없이 맑은 영혼과 깨끗한 몸을 갖고 있으며,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성스러운 존재이므로 조상의 영혼이 머물기에 가장 적당한 존재다. 다시 말하면 신생아와 조상은 매우 가까운 존재이며, 신생아는 조상의 또 다른 모습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이 바라보는 아프리카 조각의 특징에 관한 견해들을 종합해 분석한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추려낸 바 있다. 첫째, 조각들이 사실과 추상의 적당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둘째, 각 부분들이 명확하게 마무리되어 있으며 표면에 빛나는 매끄러움으로 조각에 빛과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셋째, 조각이 똑바로 서 있는 자세에서 각 부분들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넷째, 작품의 주인공이 항상 전성기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다섯째, 조각이 냉정함과 차분한 분위기를 띠고 있으며, 감정의 동요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정면성의 원리를 적용하는 미술에서 많이 드러나는 특징들이다.

인종이나 문화, 종교적 측면에서 사하라 이남의 블랙 아프리카와는 상당히 다르긴 하지만, 정면성의 원리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예가 북아프리카의 이집트 미술이다. 이집트문명은 농경에 적합한 나일 강,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발생한 인류 최초의 문명이다. 이 문명의 출현과 더불어 인류역사의 가장 중대한 패러다임들이 바뀌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채집경제에서 생산경제로, 유목생활에서 정착생활로, 주술신앙에서 체계적 신앙으로, 씨족 중심의 집단 부락에서 도시 국가로의 이행을 말한다. 이런 이행의 과정을 통해 거대한 집단의지가 발현되었으며, 인류는 본격적인 역사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집트 문명 또한 그들이 처해있던 독특한 자연환경 속에서 발현되기 시작했다. 비만 오면 범람하는 나일 강과 밑도 끝도 없이 펼쳐지는 사막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기하학이라는 추상능력을 싹트게 했으며, 척박한 환경은 그들의 시선이 영원을 향하도록 만들었다. 범람한 강은 땅을 제 멋대로 바꾸어 놓지만, 기하학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는 일이 없으며 사막처럼 막막하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영혼이 부활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는 이상, 제 아무리 삶이 고달파도 삶 저쪽 너머 영원의 세계에서 바라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그 확고한 믿음의 연장선에서 그들은 미라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집트 미술의 특징은 영원성에 대한 집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집트의 조각상들은 대부분 딱 벌어진 어깨와 투박한 가슴, 당당한 위용과 피안의 세계를 응시하는 육중한 자세의 전형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다소 경직돼 보이고 뭔지 모를 팽팽한 긴장이 스며 있다. 신성한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처럼 조각상의 모든 신경 조직들이 하나의 관념에 반응하고 있고, 그 조각상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와 시간의 흐름은 일순 정지되어 있는 듯하다. 그건 아마 조각상의 인물이 영원의 세계로 공간이동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조각상들의 눈을 보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눈동자가 지상의 어느 한 지점, 어느 한 사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으며, 이쪽이 아닌 저쪽, 그 너머 어딘가를 깊이 응시하고 있다. 벽화나 회화처럼 조형이 아닌 평면 미술에선 모든 얼굴들이 정확히 90도 옆에서 바라본 모습을 하고 있으며, 가슴은 앞을, 다리는 다시 옆을 향하고 있다.
마치 관절이 돌아가는 장난감 로봇 같은 모습 또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개념에 대한 집착이다. 얼굴은 옆에서, 그리고 가슴은 앞에서, 다리는 다시 옆에서 보았을 때 그 개념이 명확하게 드러나니까 말이다.


/터치아프리카 대표·시인

touchafric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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