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에서]소신과 표심의 갈림길/차상근기자

차상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6.01.20 14:17

수정 2014.11.07 00:26



지난해 11월초 청와대 경제정책수석실은 독일과 일본의 9월 총선 보고서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노대통령이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산행을 하고 오찬을 하며 캐나다의 멀로니 총리 이야기를 꺼낸 직후다.

복지 축소가 주된 내용인 ‘2010개혁 어젠다’와 ‘우정사업 민영화’란 초대형 개혁 과제를 각각 걸고 승부수를 던진 슈뢰더 독일 총리와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총선 결과 명암이 엇갈렸다. 노대통령은 지난해 여름 정가를 뜨겁게 달궜던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실패 이후 이들 세 총리의 결단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슈뢰더 총리는 과반 확보에 실패해 재집권에 실패했지만 고이즈미 총리는 압승을 거뒀다. 멀로니 총리는 국민적 반대를 무릅쓴 채 지난 91년 연방부가가치세를 도입했고 2년 뒤 치러진 총선에서 져 8년 집권을 끝마쳐야 했다.
멀로니의 보수당은 169석의 압도적 의석을 단 2석으로 줄여야 했고 아직도 군소 정당에 머물고 있다.

경제수석실의 보고서는 독일과 일본 국민의 개혁에 대한 시각 차를 지적했다. 높은 복지 수준과 고용 보장에 익숙한 유럽의 유권자들에게 집권 사민당의 개혁은 직접적 피해를 안겨주는 것이지만 일본에서는 정치권과 독과점 집단의 기득권을 빼앗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는 개혁으로 손실을 떠안는 직접 당사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유권자의 향배는 극명하게 달랐다는 의미다. 멀로니의 개혁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부가세를 도입한 데 대한 유권자들의 반발이 결국은 총선 참패로 이어졌다.

노대통령이 지난 18일 신년 TV연설 자리에서 양극화 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하기까지는 이들 세 총리를 벤치마킹하고 깊이 고찰했을 것이다. 노대통령은 연설 말미에 재정 확보나 연금 문제가 가장 난제임을 슬쩍 짚었다.

청와대가 재원 조달 방안은 결정된 것이 없다고 부인하지만 결국 ‘세수 증액’ 문제가 유력하다. 이 ‘뜨거운 감자’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며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노대통령이 대연정 실패 이후 몰입한 장고의 산물이 결국에는 ‘돈 문제’일 것임은 어느 정도 예상됐다. 이는 외국의 사례에서 보듯 여권의 정권 재창출에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어 과연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을까’하며 국민들은 지켜봐 왔다.

이날 연설에 대해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성장에 발목을 잡아 양극화를 심화시킬 수 있다’ ‘실패한 유럽식 복지정책을 왜 도입하나’ ‘돈으로 못풀 것이 뭐 있나’ ‘선도 부문에 의한 성장 중심의 분배와 양극화 해소가 돼야 한다’ 등 현실적 지적에서 노대통령 특유의 ‘소신있는 문제 제기’ ‘역발상’ ‘벼랑 끝 전술’ ‘대선용 유권자 양극화 전략’ 등 정치적 해석도 다양하다.

노대통령은 일단 여야 정치권이 모두 쉬쉬했던 대형 이슈를 공론화하는데는 의도대로 성공한 모습이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이번 이슈를 실천적 정책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면 남은 임기를 어렵게 갈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한 셈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노대통령이 치밀하게 고민한 끝에 외국의 세 총리처럼 확고한 소신을 세웠더라도 그 소신을 맹신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슈뢰더와 멀로니의 경우 표심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노대통령이 판단할 지 몰라도 대개 민심은 눈앞의 이익을 저해하는 정치 행위보다는 더 나은 대안을 택하기 때문이다. 집권자의 딜레마다.
노대통령은 소신과 다른 표심의 벽에 누구보다 좌절해본 경험이 많다는 점에서 화두 전개가 궁금하다.

/ csky@fnnews.com 차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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