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음란서생]점잖은 사대부의 발칙한 유혹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6.02.15 14:21

수정 2014.11.07 00:02



어느 시대에나 포르노그래피는 있었다. 공맹(孔孟)의 도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조선시대에도 음란하기 그지없는 포르노그래피는 존재했다. 다만 음란방탕한 것을 억압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수면 아래 감춰져 있었을 뿐이다.

오는 23일 개봉하는 영화 ‘음란서생’(제작 영화사비단길)은 음란한 소설을 쓰는 조선시대 최고 문장가 김윤서(한석규 분)와 춘화를 그리는 의금부 도사 이광헌(이범수 분)을 통해 그 은밀한 욕망의 내부를 헤집고 들어간다.

명망 높은 사대부 집안의 자제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김윤서는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은 삶을 살아간다. 권력의 허망함과 당파싸움의 지리멸렬함을 두루 꿰뚫고 있는 그에게 인생은 그저 심드렁한 그 무엇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김윤서는 저잣거리 유기전에서 일생 처음 보는 난잡한 책을 읽고 묘한 흥분에 달뜬다. 추잡하고 신묘망측하기 이를데없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에 몸을 부르르 떨다니. 이 어찌 해괴하고 망측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이후 김윤서는 직접 소설을 쓰고 싶은 열망에 휩싸이고 그림에 재주가 있는 의금부 도사 이광헌을 끌어들여 단군 이래 가장 음란한 소설 ‘흑곡비사(黑谷秘事)’를 일필휘지로 써내려간다. 추월색(秋月色)이라는 필명으로 장안의 지가를 높인 김윤서는 보다 더 노골적인 글과 그림을 위해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후궁 정빈(김민정 분)의 추파마저도 은근슬쩍 받아들이는데, 그가 왕의 여자와 방사(房事)를 치룬 것은 과연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음란한 책을 쓰기 위한 또다른 방편이었을 뿐인가.

‘음란서생’은 언뜻 귀네스 기비 감독의 ‘사드’와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 소설가 사드 후작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영화 ‘사드’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고, 조선시대 최고 바람둥이의 정절녀 정복하기를 그린 ‘스캔들’과도 여러모로 다르다.


‘음란서생’이 ‘스캔들’의 시나리오를 썼던 김대우 작가의 감독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의 연관성을 논할 수 있겠지만, ‘스캔들’이 수차례 영화화된 프랑스 소설가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면 ‘음란서생’은 김대우 감독이 만들어낸 순수 창작 대본이다. ‘음란서생’은 매우 음란한 이야기를 다루되 표현방식에 있어서 ‘스캔들’보다 덜 음란하고 정빈을 둘러싼 세 남자(김윤서, 왕, 조내시)의 마음은 자못 진지하고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또 과거와 현재를 절묘하게 오가는 유머 감각(이는 주로 음란소설 유통업자 황가로 등장하는 오달수를 통해서 발휘된다)과 대중예술의 창작과 유통을 둘러싼 풍속의 묘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쿡쿡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러닝타임 139분. 18세 이상 관람가.

/ jsm64@fnnews.com 정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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