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시론]마케팅 남용시대/안승호 숭실대 경영학부 교수

홍창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6.02.22 14:21

수정 2014.11.06 12:16



지난 십여년 동안 우리나라 기업의 경영관리 능력에서 가장 많은 발전을 이룬 분야를 꼽으라면 아마 마케팅 분야가 그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영업 혹은 판매 대신 마케팅 부서가 등장한 것도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미국의 한 경영 전문잡지는 중국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장점을 마케팅이라고 지적할 정도로 국내 기업의 마케팅 능력은 거의 세계적인 수준이다.

그런데 마케팅 교육자로서 국내 마케팅의 발전은 균형을 이루지 못한 절름발이 발전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마케팅은 기술 이외의 철학을 내포한 개념이다. 마케팅의 철학적 주장은 소비자 혹은 고객을 우선하라는 것이다.
마케팅과 판매가 다른 점은 회사의 관점보다는 고객의 관점을 기업의 전략 수립과 운영에 우선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외부적 마케팅이 있는가 하면, 고객의 관점을 내부 구성원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내부적 마케팅이 존재한다. 이러한 점에서 마케터들은 훌륭한 도덕적 철학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 고객의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후생 증진을 위해 마케터들이 기업의 경영진을 설득시켜 이에 부합되는 상품을 출시하도록 해야 한다.

흔히 잘못된 마케팅은 소비자의 일시적인 흥미나 주목을 끌어 상품 판매만을 성공시키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 고객에게 불리한 정보는 감추고 중요하진 않지만 타 기업의 상품과 소위 차별화될 수 있는 특징은 ‘과감히’ 과장한다. 새로운 수익창출 기회인 블루오션(Blue Ocean)을 국제 전화서비스에서는 무료 통화라고 강조하면서 ‘수신자 부담’이라는 작은 글씨를 통해, 휴대폰 통신 서비스에서는 신청하지도 않은 서비스와 이해하기 어려운 통화요금의 조작을 통해 발굴한다. 선물로 받는 만큼 엄중한 항의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으로 부실하게 구성된 갈비세트에서 블루오션을 발견하기도 한다. 서비스 신청과 계약 체결은 전화통화를 통해 가능하게 하면서 서비스 해지는 반드시 대리점을 방문해야 된다고 하니 마케팅, 고객서비스의 이름이 무색할 따름이다. 도무지 차이점을 구별할 수 없는 신용카드는 몇 군데 제휴업체가 추가됐다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선전된다. 거의 무너질 가능성이 없는 은행들은 기업의 이미지통합(CI)을 제고한다며 막대한 돈을 들여 이미지 광고를 내보낸다. 그 돈으로 대출이자나 현금출금 이자율을 낮추어 주는 것이 고객을 위하는 일이다.

최근 들어서는 제휴 마케팅이라는 명목으로 학교, 기업과 같은 조직과 장기적 계약을 하고 그 구성원은 선택의 여지없이 제휴한 기업의 상품만을 구입하도록 요구받는다. 사회적 차원에서 마케팅의 중요한 기여는 소비자의 선택을 확대하는 일이다. 20년 전에 국내 소비자는 오직 모 회사의 치약과 칫솔만을 사용해야 했다면 마케팅을 앞세워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현재는 다양한 브랜드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구매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잘못된 제휴 마케팅은 바로 이 같은 마케팅의 사회적 기여를 수포로 돌리는 일이다.

세계 굴지의 다국적 기업이 앞다투어 국내 시장을 일종의 시험 시장으로 활용한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국내 소비자의 까다로운 취향에 소구할 수 있다면 다른 아시아 시장에서 그만큼 성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 시장을 시험 시장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국내 소비자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개념도 부족하고 서비스와 상품 실패시 보상도 적으며 애프터 세일즈 서비스 수준도 그리 높을 필요가 없으며 환불이 거의 불가능한 거래 관행이 조성돼 있는 등 한마디로 국내 소비자를 경시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기 때문에 한국 시장은 시험 시장으로 적합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몇년 전의 한 통신회사와 최근의 온라인 게임업체의 개인정보 누출사건은 적어도 미국이었더라면 회사가 망했을 만한 대단한 사건인데도 현재까지 건재하거나 아직도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하고 있다. 다국적 제약회사의 신약을 테스트하기 위해 국내 병원을 자주 접촉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마케팅도 아닌 마케팅의 남용 현상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기업에 있으나 국내 마케팅 교육에도 문제는 있다. 사회적 후생을 강조하는 사회적 마케팅이라는 학문분야는 지난 60년대부터 미국에서 상당한 발전을 거듭하였으나 국내에서는 아직 초보 단계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 시장 조사자와 마케팅 담당자의 도덕적 기준은 황우석 교수의 생체연구에서만큼이나 강조될 필요가 있으나 교과서 후반부를 건너뛰다 보니 대부분의 마케팅 담당자들은 이를 들어본 적도 없다.

남용을 방지하는 가장 큰 책임은 소비자 단체 그리고 정부를 비롯한 시장 감시자에게 있다.
소비자 단체는 한 단계 높은 이론적 근거를 바탕으로 소비자 문제에 체계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비자의 금전 피해에 대해 더 철저한 보상이 제공될 수 있도록 관련 법률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
선거 즈음에 금품을 받으면 50배의 과태료를 내는 시대인데, 소비자에게 직접 피해를 입히는 사례에 대해 100배에 이르는 처벌적 배상의 도입도 검토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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