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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쉐린과 함께하는 유럽 엿보기-파리]대혁명의 영광 생생한 메아리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6.04.19 14:42

수정 2014.11.06 07:21



파리가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떤 면에서’ 절대적이다. 세계의 패러다임을 뒤바꿨던 프랑스 대혁명의 산실이 바로 파리이기 때문이다. 1789년 파리 시민들의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을 계기로 잉태된 혁명은 이후 15년이나 계속됐지만 그 산고(産苦)만큼 놀랄만한 과실을 출산했다. 정치적으로는 절대왕정에서 시민사회로, 경제적으로는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사회적으로는 앙시앵레짐(프랑스 혁명전의 구제도)에서 평등사회로 세계를 탈바꿈시켰던 것이다. 파리가 현대사회의 토대를 이룩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런 파리의 혁명은 ‘또 어떤 면에서’ 아직도 진행형이다. 혁명의 유산들이 도시 곳곳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산실이었던 바스티유에서부터 루이16세가 처형된 콩코르드 광장까지 혁명의 상흔을 담은 명소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파리를 방문했다면 에펠탑도, 베르사유궁전도, 명품 쇼핑도 좋지만 이런 역사적인 장소에도 들러봐야 하지 않을까. ‘지성인’으로서 적어도 “파리를 가봤다”고 자신있게 말하려면 말이다.

■혁명의 현장 속으로

국가적으로 중요한 죄수를 가뒀던 바스티유 감옥. 두꺼운 벽으로 축조된 성곽과 15문의 대포가 설치돼 있던 바스티유는 절대왕정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더이상 전제정치의 흔적을 찾아보긴 힘들다. 시민들의 쉼터인 광장으로 외피를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물론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바스티유 광장에도 혁명정신이 살아 있는 곳이 있다. 광장 한가운데 자웅을 뽐내고 있는 ‘7월의 탑’이 그렇다. 탑 아래에는 7월혁명 기간동안 사망한 파리 시민들이 묻혀 있다. 이들을 위해 잠시 묵념하는 이들의 모습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생 앙투완 거리와 투르넬 거리가 만나는 사거리에는 보마르쉐 동상이 서 있다. ‘피가로의 결혼’의 작가 보마르쉐를 기념하는 동상이다. 작가로 더 유명하지만 그는 혁명가란 칭호에 더 어울린다. 1789년 바스티유 공격에 동참했으며, 이후 네덜란드로 가서 무기를 구입해 위험에 처한 혁명군을 구했다.

성 카트린 광장은 혁명 직전 파리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당시 파리는 도시화에 따른 위생 불량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았다. 건물들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밀집화돼 각종 바이러스가 득세했다. 이런 상황이 혁명의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파리시는 당시 건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차량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이곳에서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식사하며 잠시 숨을 돌려보자. 위생문제는 전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비레리르 듀 템블 거리에는 로안 추기경이 살았던 로안 저택이 있다. 로안 추기경은 혁명의 뒷이야기로 널리 전해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목걸이를 둘러싼 귀족 세력과 추기경, 마리 앙투아네트의 ‘암투’가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이 됐다는 이야기다. 이런 전설이 담긴 저택에서 탈리앙을 비롯한 많은 혁명가들이 시민사회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여러모로 혁명과 얽혀있는 저택인 셈이다. 매주 화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하고는 항상 열려 있다.

■단두대의 이슬이 된 이들을 기리며

파리 시청은 혁명의 산실이다. 시민군은 바스티유를 함락한 후 루이 16세를 불러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에 경의를 표하게 했다. 1794년에는 ‘공포정치’를 펼쳤던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에게 반대하는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나자 이곳으로 도망쳐 자살을 기도했다. 시청과 연관된 두 사람 모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게 역사의 아이러니다.

센 강변 오를로쥬 구역에 있는 콩시에르쥬리는 혁명 재판소로 이용됐다. 마리 앙투와네트가 이곳에 감금돼 있었으며 로베스피에르와 지롱드당 당원들 또한 잠시 몸을 맡겼다.

오늘날 템플광장은 평온 그 자체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템플탑에는 왕실 가족들이 갇혀 있었다. 1792년 8월 튈르리 감옥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이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려야만 했다.

콩코르드 광장은 ‘루이15세의 광장’이었다. 루이15세의 기마상이 광장 정중앙에서 위용을 떨치고 있었다. 하지만 1792년 기마상은 철거됐고, 이듬해엔 루이16세를 처형하기 위한 단두대가 설치됐다. 단두대는 공포정치가 막을 내릴 때까지 마리 앙투아네트, 마담 로랑, 로베스피에르 등 1343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왕의 광장’이 ‘혁명의 광장’으로 바뀐 것이다.


/ star@fnnews.com 김한준기자

■사진설명=파리에서 가장 큰 콩코르드광장. 중앙에 루이 15세 동상이 있어 '루이 15세 광장'으로 부르다가 프랑스혁명 때 루이15세 상이 파괴되고 '혁명광장'으로 개칭됐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등 1000여명이 처형된 혁명의 광장이었다.
나중에 다시 '화합'을 뜻하는 '콩코르드'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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