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시론]말에 대한 신뢰회복이 먼저다/노동일 경희대 법대교수·시사평론가

홍창기 기자
파이낸셜뉴스

공직 생활만 50여년. 26년간 무려 9차례나 서울시 구청장 역임. 이달 말 물러나는 정영섭 서울 광진구청장의 화려한 이력이다. 그에게 관심이 쏠린 이유는 ‘직업이 구청장’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경력 때문이 아니다. “공직자는 농담 한 마디라도 허투루 해서는 안됩니다.” 정구청장이 퇴임을 앞두고 최근 한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강조한 말이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오랜 공직 경험담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구청장이 길을 가다 ‘저 건물 언제 허가됐어’라고 아무 뜻 없이 한 말이라도 듣는 직원들은 다른 뜻이 있는 줄 받아들이는 것이 공직사회입니다.” 공직자, 특히 고위직일수록 영향력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에 언행을 경계하고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지방선거 패배 후 정부·여당에서 모두가 한 마디씩 반성문을 쓰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부동산·세금 정책에 문제가 있었다며 보유세 경감 등의 처방전을 내놓고 있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송금 특검 수용, 대연정 제안이 호남을 섭섭하게 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일부 수긍할 만한 대목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몇몇 정책의 잘못으로 지역·연령·계층을 막론하고 그토록 깊고 넓은 민심 이반을 불러왔을까.

지방선거 결과는 김의장의 말대로 ‘정권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이처럼 엄중한 상황에 대해서도 지극히 표피적이고 단편적인 진단으로 그치고 마는 안이한 인식에 안타까운 생각마저 든다. 정구청장의 발언을 장황하게 인용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정권을 담당한 사람들의 언행에서 시종일관 공직자의 기본적인 자세가 결여된 것이 바로 오늘의 정권 위기를 불러온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다.

‘쪽 팔리고….’ ‘쪽수로 밀고….’ ‘깽판치고….’ 허물 없는 친구들과 대화 등 사석에서는 나 역시 얼마든지 쓰는 말이다. 그러나 방송출연 등 공적인 자리에서는 결코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위선이거나, ‘말은 사상의 옷’이라는 고상한 이유에서가 아니다. 시청자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기 때문이다.

과거 한 토론회에서 나는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 다르고 비속어와 막말을 함부로 구사하는 언어 습관이 신뢰의 위기를 부를 것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정권 초기, 권력에 도취해 있던 사람들에게 그런 비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이렇게 훌륭한 대통령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아부성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장관, 반대 의견을 내놓는 신문에 대해 독극물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서슴지 않은 의원, ‘대통령은 21세기에 앞서가는데 국민들은 아직도 독재시대에 살고 있다’거나 ‘누가 혁신을 말하거든 (청와대가 있는) 북악을 바라보라고 할 것이다’고 한 청와대 비서관들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모두가 공직자라는 기본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들의 발언이 국민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올지, 듣는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 발언의 단어 하나는 물론, 농담 한마디라도 철저한 계산 끝에 나온다고 한다. 공직자, 특히 최고의 공직자인 대통령의 말 한 마디는 그만큼 파장과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공직자는 농담 한 마디라도 허투루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니겠는가.

정부·여당의 위기는 곧 나라의 위기다. 정부·여당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면 몇 가지 표피적 정책의 변경으로는 안 된다. 자신의 힘으로 권력을 쟁취했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도 국민의 위임을 받은 공직자라는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우선돼야 하는 것이다. ‘한 마디 말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천 마디 말이 쓸모 없다(一言不中 千言無用)’는 옛말을 곱씹어 보기를 권하고 싶다.

■노동일 교수

◇약력 △48세 △서울 △서울공고 △경희대 법대 △미국 사우스웨스턴 로스쿨 △미국 변호사 △법무부 반부패세계대회조직위원회위원 △국무총리산하 한국경제사회연구회이사 △대검찰청 검찰개혁자문위원회위원 △국민일보 논설위원 △경희대 법과대학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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