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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영의 그림으로 배우는 자기계발 전략]김홍도의 ‘씨름도’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6.08.16 04:29

수정 2014.11.06 01:10



“배, 배, 배, 배신이야∼.”

영화 ‘넘버3’에서 달랑 조직원 3명의 불사파를 이끄는 조폭 우두머리 역의 송강호. 그는 화가 나면 심하게 말을 더듬는 전대미문의 황당 캐릭터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탄탄한 연기력으로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영화배우로 자리잡는다. 악역 전문이었던 이문식도 개성 넘치는 연기력을 인정받아 주연으로까지 부상했다. 화제작 ‘왕의 남자’에서 걸죽한 입담과 몸짓을 선보인 유해진은 물론, ‘음란서생’에서 음란서적을 제작 판매하는 상인 역의 오달수도 주연 못지않은 연기력을 선보인 연기파 조연들이다.

‘조연’은 연극이나 영화 같은 데서 주역을 돕는 연기나 연기자를 말한다.

역량 있는 조연들의 출연은 영화의 육질을 단단하게 한다. 그들은 주연의 보조자라기보다 차라리 대등한 관계라 하겠다. 조연이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할 때 주연도 빛나고 영화도 산다. 어떤 영화는 조연들의 열연을 빼고는 완성도를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주연급 조연’이란 말도 생겼다. 그들의 개성 넘치는 연기에 의해 영화의 작품성과 관심이 높아진다. 그림도 이와 다르지 않다.

■빛나는 조연, 엿장수 소년의 출연

단원 김홍도(1745∼?)의 ‘씨름도’는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 덕분에 작품성을 인정받은 우리 풍속화의 걸작이다.

어느 시골장터에서 씨름판이 벌어졌다. 두 명의 장사가 한창 씨름 중이다. 그 주위로 구경꾼들이 빙 둘러앉아 있다. 때마침 왼쪽의 선수가 오른쪽의 선수를 들배지기로 치켜드는 순간이다. 곧 승부가 날 것 같다. 구경꾼들도 손에 땀을 쥔다.

이 그림은 씨름을 주제로, 노트만한 작은 화첩에 무려 22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주연은 씨름선수들이고, 조연은 구경꾼이다. 그런데 만약 이들 씨름선수와 구경꾼만으로 그림이 완성되었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뻔하다. 평범한 그림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단원은 이 지점에서 탁월한 연출력을 발휘한다. 또 한 명의 인물을 열띤 씨름판에 배치한 것이다. 마치 TV나 영화에서 감칠맛 나는 조연을 투입하여 분위기를 반전시키듯이. 누구일까? 서 있는 떠꺼머리 엿장수 소년이다. 이 엿장수 소년의 출연으로 그림은 돌연 활력을 얻는다.

일반적으로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온갖 고민과 구상을 한다. 소재의 배치며 채색법 등을 치밀하게 계산한 뒤, 비로소 붓을 든다. 괴발개발 그린 듯한 그림도 알고 보면 진지한 고뇌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그 고민의 결과물(작품)을 감상한다.

같은 맥락에서 ‘씨름도’의 인물 배치도 치밀한 계획 아래 그려진 것이라 하겠다. 엿판을 둘러멘 엿장수 소년의 등장도 그렇다. 면밀한 구상 끝에 배역이며 동선이 정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에서 엿장수 소년의 역할은 무엇일까?

■걸작의 비밀, 천만불짜리 포즈

우선 A4용지에 컴퍼스로 원을 그리는 상상을 해보자. 그러면 원의 ‘중심점’은 씨름꾼이 있는 자리가 되고, ‘원’은 구경꾼의 자리가 된다. 이때 구경꾼(원) 19명의 시선이 모두 씨름선수(중심점)들을 향한다. 흥미롭다. 이들의 시선을 화살표로 바꾸어보면, 중심점을 향해서 화살표가 집중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 그런데 한 화살표만 태연히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 엿장수 소년이다. 왜 그랬을까? 그는 왜 혼자 바깥을 향해 포즈를 취했을까? 이는 혹시 긴장감을 완화시키기 위한 조형적인 배려가 아니었을까. 사실 이 화살표의 주인공은 씨름판의 긴장된 분위기에 숨통을 틔워주는가 하면, 해학적인 재미까지 안겨준다. 참으로 절묘한 배치가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씨름 장면과 엿장수 소년의 관계다. 구경꾼은 ‘결정적인 순간’에 처한 씨름선수를 따라 흥분과 긴장으로 마음을 졸이고 있다. 반면에 엿장수 소년에게는 그런 긴장감이 없다. 표정이 밝다. 왜 그럴까? 물론 엿장수 소년은 그럴 수밖에 없다. 먹고 살기 위해 엿을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 말고 다른 이유는 없을까?

그것은 긴장과 풀림의 역학관계로 작품의 조형미를 십분 살리기 위해서다. 그래서 엿장수 소년은 씨름선수를 등진 채, 바깥을 향해 서 있다. 2000만 불짜리 포즈 하나 때문에 ‘씨름도’는 걸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긴장된 순간에 여유를 더하는 소재의 배치, 긴장과 풀림의 조화, ‘씨름도’의 매력은 이런 상반된 관계의 절묘한 배합에 있다.

만약 이 그림에서 엿장수를 비롯하여 모든 구경꾼의 시선이 씨름선수에게 집중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어떨까. 씨름 장면과 이야기 구조가 단순해지고, 참기름 빠진 비빔밥처럼 허전할 것이다.

때로는 주연보다 조연이 드라마를 더 빛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가끔 재능 있는 조연으로 인해 한편의 영화를 기억하듯이, 엿장수로 인해 ‘씨름도’에 마음을 빼앗기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단원의 엿장수 소년 캐스팅과 연기 지도는 성공적이었다.

/artmin21@hanmail.net

■키포인트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자. 열정을 쏟으면 반드시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주연이다. 비록 한 조직 속에서는 조연일지라도 주연의 자세로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빛나는 조연은 곧 미래의 주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