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자총액제한제도의 뒤를 이을 정부의 대기업 규제정책이 윤곽을 드러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7월부터 10회에 걸쳐 연 대규모기업집단시책 태스크포스(TF)의 활동을 마치고 내놓은 논의결과는 대체로 출총제를 폐지하더라도 현행법상 금지된 상호출자의 변형인 환상형 순환출자만큼은 반드시 규제하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공정위는 환상형 순환출자 규제 도입이 불러올 거센 반발을 의식한 듯 순환출자 규제 도입과는 별도로 대기업집단의 지주회사 전환을 쉽게 하기 위해 현행 지주회사제도를 보완하겠다는 새로운 카드를 제시했다.
기업들에게는 매우 아플 채찍에 조그만 당근을 내놓은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순환출자 규제 도입 필요, 탈출구는 지주회사
공정위가 10차까지 진행된 TF논의를 마치고 내놓은 출총제의 대안의 핵심은 환상형 순환출자 규제방안이다.
공정위가 제시한 환상형 순환출자 규제안에 대해서 TF가 4회에 걸쳐 집중논의를 벌였다.일부 참석자들은 순환출자 해소에 따른 부담, 투자 위축 우려,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 등을 이유로 반대했지만 공정위는 순환출자가 상호출자 금지규정의 탈법형태인만큼 규제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국정감사 등을 통해 TF참여자는 물론 그동안 반대입장을 밝혀 온 재계를 비롯, 재정경제부·산업자원부 등 관계부처와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이 강하게 반발했지만 공정위의 ‘규제의지’가 꺽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공정위는 순환출자 규제 도입과 함께 현행 지주회사제도를 보완해 출총제를 대신할 정책조합에 이를 포함시키겠다는 ‘당근’을 내놓았지만 규제대상인 대기업들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공정위는 이날 브리핑에서 그동안 재벌의 지배력 확대를 막는다는 취지에서 불가입장을 밝혀 왔던 지분율 요건의 완화도 검토할 수 있다는 뜻도 내비쳤다.
국회에 이미 지주회사의 부채비율 제한을 100%에서 200%로 상향조정하고 자회사와 손자회사의 사업관련성 요건을 폐지하는 내용의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상정돼 있고, 지주회사의 지분율 요건을 낮추는 의원 입법안도 나와 있는 만큼 지주회사제도의 보완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공정위의 속내는 재벌들의 지주회사 전환요건을 완화해 순환출자 규제 도입으로 큰 부담을 떠안을 재벌들에게 탈출구를 제공함으로써 순환출자 규제 도입에 반대해 온 여론을 무마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국내 30대 그룹이 환상형 순환출자 고리를 끊기 위해 팔아야 할 계열사 지분 규모는 3조5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시장선진화 태스크포스의 일원인 김진방 인하대 교수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현대자동차그룹이 1조1900억원의 계열사 지분을 처분해야하며, 삼성그룹 1조1300억원, 현대중공업그룹 2900억원, SK그룹 2200억원, 롯데그룹 1400억원, 두산그룹 1300억원, 동부그룹도 1000억원어치를 팔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의 양도세 부담은 불가피하다. 총수 중심의 지배구조가 와해될 것으로 우려하는 대기업들은 바로 이점을 들어 순환출자 금지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배구조 유지를 위해서는 내다판 지분을 다른 계열사나 총수가 되사는 비용을 치러야 하는 데다 세금부담을 고려할 경우 순환출자 해소비용이 약 20% 증가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무는 “지주회사 요건을 완화한다는 공정위 입장에 대해 큰 이견은 없다”면서도 “그러나 출총제를 폐지하면서 결국 순환출자 규제를 도입한다면 결코 기업들의 부담을 완화시켜줬다고 보기 어렵다”고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상무는 또 “지주회사의 부채비율이나 지분율 요건 등을 어느 수준에서 결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재 지주회사로 전환할 수 있는 기업도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국경제연구원 배상근 연구위원도 “지주회사로 전환할 수 있는 기업들이 많지 않다”면서 “출총제로 큰 부담을 가진 삼성그룹도 지주회사로의 전환이 불가능한 상황이어서 결국 순환출자의 규제를 받게 된다”고 말했다.
■정부 최종안에서 공정위 입장 유지될까
공정위는 이같은 논의 결과를 바탕으로다음 달 중 정부안을 최종확정지을 계획이다. 이 달까지는 환상형 순환출자 규제 도입과 현행 지주회사제도 보완을 중심내용으로 한 자체 기본안을 만들고 정부안이 확정되면 입법작업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공정위 바람대로 될 지는 미지수다.정부안은 재정경제부와 산업자원부 등 관계부처와의 논의를 거쳐야하고,여당인 열린우리당과의 당정협의도 벌여야 하는 등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어려워진 경제여건으로 대기업의 투자 확대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현실적 요구로 출총제라는 덩어리 규제 폐지에 대한 외부의 압력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재계의 조건없는 출총제 폐지요구에 대해 여당의 의장과 정책위의장이 이를 약속한 상황인데다 재정경제부와 산업자원부는 투자활성화 차원에서 출총제 폐지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도 불리한 여건이다.
이미 순환출자 규제시 유예기간과 관련해 여당 입법안이 공정위의 3∼5년 기간부여와는 달리 10∼20년의 장기 유예기간을 고려하고 있고, 순환출자 해소시 지분매각에 대한 세제혜택을 조세당국인 재경부가 불가입장을 밝혀 조율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TF논의를 통해서도 합의를 이뤄내지 못해 이견이 팽팽한 상황에서 아무래도 재계의 의견에 민감한 여당과의 당정협의 과정에서 공정위의 입장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asunmi@fnnews.com윤경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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