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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영의 그림으로 배우는 자기계발 전략] 김두량 ‘흑구도’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7.01.18 16:39

수정 2014.11.13 17:55



※애정 어린 세심한 관찰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다

중국산 ‘개자원화보’는 조선에서 그림 그리는 이들이 애독한 베스트셀러였다. 동양 회화를 공부하는 데 필요한 이론과 실기를 설명해놓은 이 책을 보며, 많은 화가들이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고 익혔다. 한때 입시생들이 서구의 위인들로 만든 석고상 그리기를 통해서 미술에 입문했듯이, 조선시대에는 ‘개자원화보’ 따라 그리기가 입문과정이었다. 이 땅에 언제 들어왔는지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당대의 화가들에게 최고의 교과서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화보에만 의존한 나머지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이런 외래지향적인 미술풍토에 반기를 든 이들이 있었다. 겸재 정선을 필두로 조선의 진경산수를 그린 화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더 이상 중국풍의 관념적인 산수화가 아니라 이 땅의 산수를 그리고자 했다. 이런 움직임에 힘입어 우리의 산수는 비로소 그림 속에 둥지를 틀 수 있게 되었다.

■살아있는 ‘진실하고 참된 그림’

신토불이 그림 그리기는 진경산수뿐만이 아니었다. 동식물을 그린 ‘영모화훼’에도 나타났다. 관아재 조영석(1686∼1761)의 ‘사제첩’에 담긴 그림 중에는 ‘강아지’라는 흥미로운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현장에서 개를 직접 마주한 채, 유탄으로 스케치를 한 뒤 수묵과 담채를 하나씩 올려가며 사생하던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는 두 마리의 개를 그리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뒷모습을 한 개는 대강 그렸으나, 정면으로 앉은 개는 자꾸만 움직이는 바람에 윤곽만 잡은 뒤 붓을 놓았다.

예전 같았으면 관념적으로 대충 그렸을 개를 실제 모습을 통해 실감나게 표현하려 한 것이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관아재는 대상을 직접 마주 대하고 그리는 그림이야말로 진실하고 참된 그림, 즉 ‘진화(眞畵)’라고 주장했다.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개자원화보’를 덮고, 자신이 보고 자기 방식대로 그리려는 화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남리 김두량(1696∼1763)은 관아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사대부 출신으로, 그림을 취미로 그린 화가였던 관아재는 전문 화가들에 비해 묘사력에서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남리는 묘사 능력이 탁월한 화원 화가였다. 게다가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까지 표현하는 초상화의 전신(傳神) 기법을 활용하여 사생화풍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관아재가 포기한 그 지점에서 남리는 개 그림에 활달한 생명력을 부여했다.

■치밀한 묘사로 개의 마음까지 그려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기본으로, 태서법(서양화법)에도 능했던 남리. 그의 개 그림에 임금이 친히 어제를 내릴 정도로 영조 임금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런 남리의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작의 하나가 ‘흑구도’이다.

이 그림은 검정개 한 마리가 심한 가려움을 참지 못해서 땅바닥에 나뒹굴 듯이 엎어진 채 뒷다리로 몸을 긁고 있는 광경을 스냅사진 찍듯 포착한 것이다.

이런 포즈는 제대로 그리기가 어렵다. 그런데 남리는 치밀한 묘사력을 발휘하여 성공적으로 그리고 있다.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일지언정, 개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마음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다. 초상화로 치면 인물의 정신까지 그려낸 격이다.

개는 외래종인 듯 주둥이와 꼬리가 길다. 수백 개에 달하는 털을 예리한 붓질로 생동감 있게 처리했다. 뒤틀린 몸짓을 따라서 털의 변화를 적절히 포착하고 있다. 그래서 개의 머리 부분은 털이 짧고 반들반들하다. 등 부분은 곧고 가지런하며, 목과 배와 허벅다리 부분은 길고 덥수룩하다. 화가의 세심한 관찰이 돋보인다.

또 표정이 살아있는 눈동자는 어떤가. 남리는 눈동자에 농담과 명암까지 넣어서, 가려운 곳을 긁을 때의 절묘한 표정과 심리를 날카롭게 잡아냈다. ‘어이구, 시원하다’고 눈으로 말하는 듯하다. 이는 그가 개의 생태는 물론 그 마음까지 잘 아는 사람임을 드러낸다.

이 그림에서 주목할 곳은 또 있다. 개의 치밀한 묘사와 상반된 배경의 처리방식이다. 수묵의 몰골법으로 거칠게 그린 나무와 잡풀들은 언뜻 보면 개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개를 살려주는 보조 기법으로서는 그만이다. 꼼꼼함과 허술함을 대조시켜서 개를 돋보이게 한다. 또 그림이 답답하지 않도록 배경에서 활달한 필치로 풀어준다. 허(배경)와 실(개)의 조화인 것이다.

■세심한 관찰과 생생한 실감

남리는 개도 초상화를 그리듯이 그렸다. 그래서 도화서의 일급 화원 화가였던 남리의 기량이 개 그림에도 고스란히 발휘되어 있다. 내면의 정신까지 표출하는 초상화의 전신 기법을 바탕으로 개의 심리까지 묘사하는 진경을 열었다. 이는 현실에 대한 세심한 관찰의 결과다. 무슨 일에서든지 현실에 기초하지 않을 때, 흔히 관념적이라든지 탁상공론 같은 소릴 듣게 된다. 이는 생생한 실감이 없다는 말이다. 현실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연구를 토대로 자신의 기량을 발휘할 때, 효과는 극대화된다. ‘흑구도’는 빼어난 관찰의 결실이다.

■키포인트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계획은 실패하기 쉽다.
반면에 현실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관찰은 생산적인 결실로 이어진다. 틈새시장의 발견도 실은 현실에 밀착된 연구의 산물이다.
돌파구는 현실에 있다.

artmin21@hanmail.net

■도판설명=김두량, ‘흑구도’, 종이에 수묵, 23.0×26.3㎝, 18세기 중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위 작품) 조영석, ‘강아지’, 종이에 수묵, 28.5×20.5㎝, 18세기 중반, 서울 종가 소장

/hyun@fnnews.com 박현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