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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영의 그림으로 배우는 자기계발 전략] 드가 ‘열네 살의 어린 무희’

박현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7.02.08 16:38

수정 2014.11.13 16:58



※드가,조각을 만나 예술인생 2막을 열다

르누아르, 모딜리아니, 도미에, 드가, 피카소, 마티스, 브라크….

이들의 공통점은? 화가다. 맞다. 그런데 절반만 맞았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화가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화가이면서 조각가였다.
회화 못지않게 조각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물론 이전에도 다방면에서 천재성을 발휘한 작가들은 있었다. 굳이 회화와 조각, 건축에서 놀라운 재능을 보인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언급할 필요도 없이 르네상스 시대에는 화가가 곧 조각가이자 건축가였다. 이런 ‘멀티플레이어’ 예술가상은 17세기의 베르니니를 마지막으로 미술사에서 사라진다. 그후 예술의 각 장르는 분화하여 점차 전문화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말부터 20세기에 ‘조각하는 화가’들이 무더기로 등장한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회화와 조각을 넘나들었다. 물감과 더불어 진흙까지도 표현의 재료로 사용한 것이다,

이런 ‘화가의 조각’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자기 회화의 연장선에서 조각을 한 경우, 다른 하나는 자기 회화 세계와는 다른 조형미를 조각에서 추구한 경우다. 전자에는 도미에, 르누아르, 드가 등이 있고, 후자에는 피카소, 마티스, 브라크 등이 있다.

■시력 약화가 만든 ‘조각가 드가’

일명 ‘무희의 화가’로 통하는 일레르 제르멩 드가(1834∼1917). 그는 회화는 물론 조각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남겼다.

경마 장면과 목욕하는 여인들의 은밀한 모습을 그렸던 드가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발레리나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는 무희들의 순간적인 모습을 냉철하고 정확하게 포착하여 화면에 정착시켰다. 무희는 무한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희가 지닌 젊고 화려한 분위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그들이 연출하는 풍부한 포즈를 냉정한 시각으로 관찰하고 그렸을 뿐이다.

심한 류마티스 때문에 조각을 시작한 르누아르처럼, 드가도 건강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조각에 손을 댔다. 즉 말년에 닥친 시력 약화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눈이 나빠져서 연필과 파스텔 이외의 재료는 써볼 엄두도 낼 수 없는 지금, 형태에 대해 내가 받은 인상들을 조각을 통해 표현해보고 싶은 욕구를 어느 때 보다도 강하게 느끼게 된 거지.”

사실 그가 ‘맹인의 예술’이라고 부른 조각을 시작한 것은 30대 초반(1865)부터였다. 하지만 그때는 본격적인 몰입이 아니었다. 따라서 조각에 대한 기초도 전혀 안 되어 있었다. 자유롭게 재료를 만졌다. 그러다가 말년에 자신의 촉각에 의지하여 조각에 몰두했다. 주제도 말이나 무희였다. 그의 조각은 회화 작업의 연장선이자 회화를 대체하는 표현이었다. 그는 정확한 포즈를 포착하기 위해 부단히 연구와 실험을 되풀이했다.

1893년부터 1900년까지 제작한 작품 중에는 여러 가지 포즈의 무희를 조형한 37점이 있다. 이들 작품에서 드가는 무희의 신체를 소재로 한 역동적인 포즈의 조각품을 빚었다. 그는 인상파 화가들이 ‘빛’의 순간에 매혹되었듯이, ‘움직이는 것’들의 한 순간을 포착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의 작품은 움직이는 포즈에서 단연코 빛났다. 반면에 정적인 작품은 힘이 떨어졌다.

■스커트를 입고 실크 리본을 맨 조각

드가가 마흔두살 무렵에 제작한 ‘열네 살의 어린 무희’는 정적인 작품 중에서도,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어린 무희가 등 뒤로 깍지를 낀 채 서 있다. “모슬린 스커트를 깃털처럼 허리에 두르고 빳빳한 목 둘레를 장식한 황록색 리본과, 하나로 땋아내린 머리를 리본으로 묶어 등 뒤로 늘어뜨린 모습”으로 금방이라도 좌대에서 내려 설 것만 같다.

제6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한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레디메이드(기성품)를 사용하고 있다. 즉 조각에, 감히 천으로 만든 실제 스커트를 입히고 리본을 사용한 것이다. 일반 조각가라면 스커트와 리본을 천 느낌이 나게 밀납이나 청동으로 주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드가는 그것을 밀납으로 만드는 대신 천을 직접 사용했다. 조각의 거장인 로댕도 옷을 일일이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일개 화가가 조각계의 불문율을 깨트린 셈이다. 이는 기성품을 조각에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이 작품이 미술사적으로 주목받는 이유의 하나는 여기에 있다.

■사후에 발견된 ‘맹인의 예술’

이 작품을 제외한 드가의 조각품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타인을 감동시키기 위해 조각을 하지 않았다. 또 자신이 결코 조각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던 만큼 꾸준히 조각을 했으면서도 생전에 석고로 뜬 작품은 3점뿐이었다. 그의 작업실에서 대부분이 밀랍으로 만든 150여 점의 작품을 발견했을 때는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그래서 복원작업을 거쳐 겨우 73점만 청동으로 주조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접하는 드가의 조각품은 그렇게 빛을 본 것들이다.


※키포인트=한 우물만 파면, 밥은 배불리 먹을 수는 있다. 하지만 커피 한 잔이 주는 여유와 향기는 못 누릴 수 있다.
한번쯤 ‘한 우물 파기’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보자. 드넓은 세상과 싱싱한 도전이 첫사랑의 그때처럼 가슴 뛰게 할 것이다.

/artmin21@hanmail.net

■도판설명=드가, ‘열네 살의 어린 무희’, 청동·모슬린 스커트·실크 리본, 높이 98.4㎝, 1880∼1881.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뉴욕

/hyun@fnnews.com 박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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