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칼럼] 한 학자의 끝없는 학문적 열정/노정용 문화부장

노정용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7.02.12 16:37

수정 2014.11.13 16:53



40여년 전 일이다. 중국사 전공의 새내기 대학원생 권중달씨가 필생의 목표를 정한다. 석사 논문으로 명말 학자인 왕부지(王夫之)의 ‘독통감론(讀通鑑論·자치통감 평론)’을 준비하면서 ‘자치통감(資治通鑒)’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자치통감’은 북송시대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사상가이며 역사가인 사마광(1019∼1086)이 주(周) 위열왕(威烈王) 23년(기원전 403) 이후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서기 직전인 오대(五代)까지 1362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294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역사서다. 당시 시대 분위기는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거대 담론을 추구했지만 그는 석사과정에 이어 대만정치대학 박사과정에서도 ‘자치통감’을 박사 논문의 주제로 정하는 등 평생을 ‘자치통감’과 함께하는 ‘통감 인생’을 살기로 한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후에도 ‘자치통감’을 늘 머릿속에 담아둔 권 교수는 더 이상 번역 작업을 미룰 수 없어 10년 전인 지난 97년부터 본격적인 번역의 대장정에 오른다.
혼자 매일 밤 자정이 넘도록 번역하는 고된 생활을 5년 동안 지속하다가 지난 2002년부터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박사급 연구원 7명과 함께 2005년 말 초벌 완역을 해낸다.

처음에는 번역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막상 번역을 해놓고 보니 문제가 생겼다. 편년체의 ‘자치통감’이 가치 있는 역사서임은 분명하지만 워낙 내용이 방대하고 상업적으로는 주목 받기도 어려운데다 한문 번역서의 편집도 까다로운 탓에 출판을 하겠다고 나서는 출판사를 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00년 3월 도서출판 세화에서 1권이 나왔고 2∼4권은 출판사를 바꿔 도서출판 푸른역사에서 빛을 봤다. 하지만 더 이상 세상구경은 힘들었다. 출판사들이 ‘돈이 되는’ 상업 출판에 몰려다닌다고 출판사를 탓할 수만도 없었다. 현실이 그러하니 그로서도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래서 권 교수는 아예 생각을 바꾸었다.

지난해 2월 중앙대를 퇴직하면서 아껴둔 퇴직금으로 출판사를 차리기로 결심했다. 부인의 이름으로 도서출판 삼화라는 출판사 등록을 내고 최근 600쪽 안팎에 이르는 5∼8권을 출간했다. 후한시대와 삼국시대 편이다. 한 저작물이 출판계약이 완료된 뒤 출판사를 옮긴 적은 있으나 이처럼 한 시리즈가 여러 출판사를 거친 진기록은 처음이다. 좋은 의미의 진기록이 아니라 뒷맛이 개운치 않은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권 교수가 완역한 ‘자치통감’은 600쪽짜리 단행본으로 31권이다. 지금까지 8권이 출간됐으니 앞으로도 23권(2009년 완간할 계획)이 더 나와야 한다. 이를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환산하면 무려 8만장 분량이다. 지난 2005년 말 완역을 끝내놓고 권 교수는 요즘에도 전집 출간을 위해 원문을 교정하는 한편, 번역 어휘와 문체 그리고 체제를 통일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고 한다.

“‘자치통감’은 전국 시대부터 송나라 이전까지 136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로 ‘춘추’ ‘사기’와 더불어 3대 사서(史書)에 속합니다. 중국 문화의 절정기인 송대에 쓰인 만큼 당대의 문·사·철(文史哲)이 녹아 있는 명문장이자 제왕학의 교과서이지요. 누군가 원전을 완벽하게 번역해 놓으면 후학들이 좀 더 편안하게 학문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명감에 이 일에 매달리게 됐습니다.”

번역은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받기도 힘들다.
외국에서는 번역을 창작과 거의 다름없는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하는 풍토이지만 우리 학계에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년 동안 염원을 세우고 그 염원을 실천하는 한 학자의 올곧은 집념과 열정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처럼 또하나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갈 길은 멀지만 보람 있는 길을 걷고 있는 노학자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noja@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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