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정민영의 그림으로 배우는 자기계발 전략] 강희안 ‘고사관수도’

박현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7.02.22 16:39

수정 2014.11.13 16:06



※“한박자 천천히”…선비가 전하는 오래된 선물

현대사회는 속도전의 사회다. 사람들은 대부분 속전속결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더 빨리 달려야 하고, 더 빨리 접속해야 하고, 더 빨리 클릭해야 한다. 페스트 푸드가 번창하고, 신제품이 하루가 다르게 옷을 갈아입는다. 세상이 눈부시게 발전한다. 덕분에 문명의 혜택이 주는 삶의 풍요를 누린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사람들은 피곤에 절어 있다. 그래도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스피드를 멈출 수가 없다. 속도는 현대사회의 핵심요소다. 더 빨리, 더 많이 생산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분명 중요한 뭔가를 빼먹고 있으면서도 속도의 컨베이어벨트에서 내려갈 수가 없다.

■속도 제일의 시대에 느리게 살기

그렇다고 세상이 뛰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늑한 휴식을 추구하는 삶도 있다. 무한경쟁의 한켠에서 번지는 느리게 살기 바람이 그것이다. 속도가 우리 삶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행복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등의 자문을 통해 사람들은 걸음을 늦추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가다듬고 느리게 걷는 가운데 행복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90년대 들어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운동이 바로 ‘반속도(Antitempo) 운동’이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슬로비스(Slobbies)’든,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템푸스(Tempus)’든, 이 모두가 속도에 매몰된 삶의 질을 회복하자는 운동이다. 슬로비스는 느리기는 하지만 자기 일은 확실하게 처리하는 사람을 일컫고, 템푸스는 한마디로 느리게 살기 운동이다.

이런 움직임은 자연의 순환을 따라 가면서 우리 생명의 리듬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편안한 휴식 같은 그림

인재 강희안(1418∼64)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삶의 쉼표 같은 그림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물이 흐른다. 화면 중앙에 놓인 바위에 엎드린 한 선비가 팔을 괸 채 잔잔한 수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 그림을 가만히 들려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마가 벗겨진 선비는 뭐가 그리 좋은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표정이 박꽃처럼 해맑다. 수면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벙긋 웃는 표정 같다.

‘고사관수도’란 ‘고결한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비록 그림은 소설책 크기만큼 작지만 감동의 질감은 물처럼 맑다. 깊은 사색과 잔잔한 관조가 일품이다.

이 그림은 인물중심의 대담한 구도가 돋보인다. 같은 시기에 그려진 안견의 그림과 비교해보면 그 특장이 확연해진다. 당시 안견화풍의 상징적인 그림인 ‘몽유도원도’는 원거리에서 본 웅장한 산수를 보여준다. 그러다보니 인물의 역할이 도외시되거나 왜소해졌다. 반면에 ‘고사관수도’는 클로즈업하듯이 인물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인물이 화면의 중심을 이루고 산수는 배경으로 간략하게 그리는 ‘소경산수인물도’ 방식이, 그림에 구현되어 있다. 소경산수인물도는 중국 명나라의 절파 화풍의 유행과 더불어 조선 중기에 많이 그려진 화풍이다.

■물을 보며 씻는 마음의 때

이 그림은 인물을 중심에 두면서, 풍경에 묻히지 않고 자연과 호흡하는 선비의 내면풍경을 따뜻하게 보여준다. 이런 분위기는 서로 다른 필치의 영향도 있다. 즉 절벽과 넝쿨, 바위 등이 강한 흑백대비와 힘 있는 붓질로 처리된 반면, 선비의 얼굴과 옷은 뭉툭한 선묘로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다. 대조적이다. 거친 필치 속에 부드러운 선묘를 안배하여 고즈넉함을 부각시킨 것이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풍경 속에, 선비의 미소만이 은은하게 퍼진다. 세속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연과 벗하며 내면의 평화를 찾은 듯하다. 물은 거듭남을 상징한다. 물로 세수를 하고 탁족을 하듯이 잔잔한 물을 보며 마음의 때를 씻는다. 물은 관조의 수단이다. 물은 무문자(無文字) 경서다. 경서를 묵독(默讀)하는 가운데 서서히 귀가 열린다. 방안의 불빛이 차고 넘치듯, 내면의 충일감이 미소로 번진다. 물아일체의 경지다.

인재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세종대왕의 처조카였다.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그는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고, 관직이 올라가는 것도 사양할 정도로 욕심이 없었다. 시와 그림과 글씨에 모두 뛰어나서 시서화 삼절이라고 불렸다. 이런 성품과 재능을 집약한 듯한 호인 ‘인재’도 ‘어진 이의 서재’라는 뜻이다. 하지만 전하는 그림은 고작 서너 점밖에 안 된다.

‘고사관수도’는 ‘페스트 푸드’의 시대에 더 빛나는 ‘슬로우 푸드’ 같은 그림이다. 한번쯤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며 천천히 살기를 권유한다.
이 그림은 우리의 ‘오래된 미래’다.

■키포인트=때로는 시대착오적인 삶을 살자. 모두들 질주할 때, 삶의 속도를 늦추어보자. 자신을 돌아보는 가운데, 비로소 그 사람 눈빛 같은 행복이 슬쩍 팔짱을 껴올 것이다.
느린 걸음이 보약이다.

/artmin21@hanmail.net

■도판설명=강희안, ‘고사관수도’, 종이에 수묵, 23.4×15.7㎝, 15세기 후반, 국립중앙박물관소장.

hyun@fnnews.com박현주기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