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왕과 나(The King and I)’를 보러가는 관객들은 머리가 어느 정도 굳어 있다고 봐야 한다. 영화에서 왕 역할을 한 율 브린너, 안나(영국인 가정교사) 역할을 한 데보라 커의 이미지가 워낙 단단히 박혀 있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두 쌍을 비교하면서 이러니저러니 평가를 내리게 마련이다.
나라고 예외가 아니다. 게다가 내용을 더 깊숙이 파악한답시고 바로 며칠 전 영화를 봤기 때문에 공연 내내 두 개의 이미지가 머리를 맴돌았다.
이런 상태로 공연을 봤으니 전설이 된 브린너-카 커플을 폴 나카우치-브리애나 보르거 커플이 꺾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이는 게 당연하다. 막상 부족한 점을 꼭 집어내기는 어렵지만 뭔가 분위기가 다른 것만은 틀림없다. 굳이 흠을 찾자면 나카우치는 시쳇말로 포스가 달리는 것 같고, 보르거는 배역에 비해 좀 억센 모습이어서 품위가 떨어진다고나 할까.
굳이 하나 더 꼽자면 뮤지컬 넘버 ‘쉘 위 댄스’(Shall we dance)에 맞춰 왕과 안나가 딱 한번 무대를 도는 걸로 끝난 건 못내 아쉽다. 두 번 정도 무대를 빙 돌아 휘저었으면 더 신나고 좋았을 텐데 말이다.
사실 나카우치-보르거보다는 텁팀(버마에서 왕에게 보낸 ‘선물’) 역을 맡은 루즈 로어의 목소리가 거칠어 더 신경이 쓰였다. 애인 룬타(버마 왕자·엔리크 에이스비도)와 맺어진 텁팀의 운명적인 사랑은 왕과 안나의 애틋한 사랑 못지않게 공연을 이끌어가는 핵심 요소다. 후궁을 십수명 거느린 왕의 야만성이 돋보이려면 텁팀의 노래가 애절하고 가냘플수록 좋은데, 고음에서 우렁차게 나오니까 듣기가 민망하다.
‘왕과 나’를 아주 감동적으로 봤다면 그는 적어도 나보다는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다. 아들을 하나 둔 영국 미망인과 자식을 수십 명 둔 사이암(태국의 옛 지명) 왕의 사랑은 그냥 애틋한 사랑 정도다.
대신 볼거리는 괜찮다. 특히 텁팀이 각색한 공연 속 연극 ‘엉클 톰스 캐빈’은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태국의 전통 춤과 무용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언뜻 중국의 경극을 연상시킨다. 노예 일라이사가 폭군 주인 사이먼으로부터 도망치다가 부처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다는 내용이다. 두말 할 것 없이 폭군 사이먼은 사이암 왕, 일라이사는 텁팀 자신이다.
‘왕과 나’는 ‘사운드 오브 뮤직’과 비슷한 데가 있다. 아이들을 매개체로 권위적인 왕은 영국 출신의 미망인 가정교사와, 무뚝뚝한 군인 아버지는 순수한 수녀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지는 대목이 그렇다. 갈등 끝에 가정교사를 때려치우려다가 아이들 때문에 다시 맺어지는 것도 흡사하다. 이런 설정이 서구인들의 입맛에 맞는 모양이다.
‘왕과 나’는 실존인물을 모델로 삼았다. 사이암 차크리 왕조의 몽쿠트왕(재위 1851∼1868)과 안나 레오노웬스라는 영국인 가정교사가 바로 그들이다. 뮤지컬에서 왕은 줄곧 ‘과학적’(Scientific)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실제 몽쿠트왕은 오늘날 태국에서 ‘현대과학과 기술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또 19세기 영국·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태국의 주권을 지킨 탁월한 외교 전략가로도 유명하다. 뮤지컬에서 안나가 왕에게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진위 여부를 놓고는 논란이 있다.
나카우치-보르거 커플에게는 미안한 마음도 든다. 늘 브린너-카 커플과 비교당할 팔자이기 때문이다. 어디 나카우치-보르거 커플 뿐이랴. 특히 말끝마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etc, etc)”를 외치며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펼친 율 브린너는 곧 왕(The King)으로 통했다. 후임자들은 그를 뛰어넘어 자기만의 캐릭터를 구축해야 할 숙명을 안고 있다.
1951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뮤지컬 ‘왕과 나’는 올해로 56년째를 맞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율 브린너는 1952년 토니상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4년 뒤엔 영화 ‘왕과 나’로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최고배우상을 받았다.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팀의 내한 공연인 만큼 배우들은 당연히 영어를 쓴다. 관객들은 자막을 보면 된다. 그러다 보니 배우들의 말과 우리말 자막 사이에 약간 시차가 생긴다. 말 자체의 강약과 높낮이에서 풍기는 뉘앙스를 자막으로 옮기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 결과 무대와 객석 사이에 친밀한 교감을 기대하긴 힘들다. 게다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1563석)은 아주 넓다.
입장권은 비싸다. VIP석 12만원, R석 10만원, S석 8만원, A석 6만원, 제일 싼 B석이 4만원. 투자 대비 효용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느낄 듯하다. 오리지널 캐스트라지만 왕자와 공주 14명은 한국 어린이들을 뽑았다. 그래서 그런가, 하나같이 깜찍하고 예쁘다.
◇언제: 2007년 5월 22일(화) 오후 8시
◇어디: 서울 국립극장
◇출연: 폴 나카우치(왕), 브리애나 보르거(애나·영국인 가정교사), 루즈 로어(텁팀·왕의 후궁), 엔리크 에이스비도(룬타·버마 왕자), 바비 마르티노(크랄라홈·사이암 총리), 스티븐 유(출라롱콘 황태자)
/paulk@fnnews.com 곽인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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