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에 미친 화가 그림에 비친 詩心
“백자항아리 궁둥이를 어루만지면 글이 저절로 풀린다.”
조선시대 백자항아리를 유난히 사랑한 화가가 있었다. 그의 집은 마루 밑까지도 백자항아리가 가득 차 있었다. “목화처럼 다사로운 백자”, “두부살같이 보드라운 백자” 등 백자항아리 예찬은 끝이 없었다.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별이 된 화가 수화 김환기(1913∼74). 활동무대를 파리, 상파울로, 뉴욕으로 넓혀 가며 한국적인 작품세계를 완성한 그가 이 ‘내 사랑 백자’의 주인공이다.
■백자항아리에 미친 화가
수화의 작품세계를 거칠게 분류해 보면, 초기의 순수기하학적 구성의 추상작업, 두 번째 시기인 해방 이후의 자연주의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한 형상작업, 그리고 세 번째로 일명 ‘점화(點畵)’로 통하는 뉴욕시대의 추상작업 시기로 각각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 두 번째 시기를 채운 것은 백자항아리를 중심으로 한 자연주의적인 소재였다. 산, 달, 항아리, 매화, 사슴 등 전통적인 시상의 대상이었던 자연물이 그것. 이는 문인화적 소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수화가 이런 소재를 선택한 것은 전통적인 문인정신의 계승과는 거리가 있었다.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의 세례를 받은 화가로서, 우리다운 한국미의 원류를 찾기 위한 몸짓의 하나였다. 그것은 간략한 선을 중심으로 한 형태의 단순화로 나타났다. 추상과 구상의 중간적인 스타일이었다.
수화의 백자항아리에 대한 관심은 개인적인 취향이기만 했을까. 아니다. 그것은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의 연장선에 있었다. 즉 “1930년대 이후 문화인들의 소극적인 민족의식의 소산으로 유행했던 의고취향에 포함된 것”(권행가·정인숙)이었다.
■그림으로 부른 ‘영원한 노래’
‘영원의 노래’는 항아리와 학과 사슴, 산, 구름 문양 등이 조화를 이루며 문학적인 정서를 강하게 풍긴다. 평면적인 구성과 장식성, 그리고 두터운 마티에르를 통해 작품은 견고성을 획득한다. ‘영원’의 소재인 전통과 자연이 같은 공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제목에 주목해보자. 왜 하필이면 ‘영원의 노래’일까. 이 제목에는 수화의 세계관과 조형관이 압축되어 있다. 무슨 말인가.
‘영원’이란 수화가 지향한 세계였다. 그림에 등장하는 학, 사슴, 항아리 등이 자연의 영원성을 상징하고, 항아리와 구름문양 등이 전통의 영원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노래’란, 알려져 있다시피 ‘리듬’이 생명이다. 시인들이 시를 쓸 때 언어의 조직으로 시에 리듬을 부여하는 것처럼 수화는 선과 색으로 화면에 리듬을 부여했다. 비유하건대 이 시기의 그림이 가사를 가진 노래라면, 뉴욕시대의 추상화는 실내악처럼 악곡만 연주하는 음악이었다.(박용숙)
이런 그림은 시적 정취가 가득하다. 자신이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했던 수화는 미당 서정주나 김광균의 시 세계를 그림으로 옮길 정도로 시에 관심이 많았다. 더욱이 그가 소재를 간략화한 것은 시적인 이미지의 추구와 통하는 것이었다. 시가 언어를 정제시켜서 표현의 밀도를 극대화 하듯이 그는 형상과 색채를 적절히 조율해서 밀도 있는 조형언어를 빚어냈다.
절제된 형상과 아기자기한 리듬, 색채의 조화와 풍부한 시적 정취.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을, 그림으로 쓴 한 편의 시였다
■영원한 세계로의 망명
화가의 예민한 감각은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현실과 정면으로 대결하거나 현실 초월적인 자세를 취한다. 수화는 현실을 초월한 세계, 영원의 세계를 지향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전쟁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체득한 현실에 대한 환멸과 체념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전통과 자연으로 상징되는 영원의 세계 혹은 초월의 세계로 조형적인 망명을 떠난 것이 아니었을까.
영원한 자연과 영원한 전통으로 현실을 초월하기. 이는 1950년대 지식인들의 공통된 초상이기도 하다. 수화도 그런 정서 속에서 작업을 했다. 그래서 시끄러운 현실과 동떨어진 ‘조형의 낙원’에서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더 영원한 조형세계를 찾아서, 1963년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형상을 더욱 요악하고 내면화시켜 점 선 면 같은 완전한 추상으로 나아갔다. 추상화는 변화무쌍한 현실과 절연된, 영원히 변치 않는 조형세계다. 이때 캔버스에 무수한 점을 찍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69) 같은 조형미의 절창이 탄생한다.
수화는 전통적인 소재를 곰삭혀 세계적인 미술과 어깨를 나란히 한 한국현대미술의 거장이다.
■키포인트=옛것은 ‘오래된 미래’다. 옛것을 깊이 연구하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조선시대의 백자가 화가의 지극한 관심에 힘입어 그림으로 태어났듯이, 누구나 옛것에서 고단백의 아이디어와 지혜를 길어낼 수 있다.
/artmin21@hanmail.net
■도판설명=김환기, ‘영원의 노래’, 캔버스에 유채, 162.7×129.5㎝, 1957 호암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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