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뮤지컬 ‘러브’ 출연 일반인 배우를 만나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7.12.20 09:12

수정 2014.11.04 14:59

흰 머리를 드러내고 허리는 구부정하게 굽혀라. 최대한 늙어보여야 한다.

뮤지컬 ‘러브’의 출연자들이 요즘 특히 신경쓰는 부분이다. 내년 2월1일부터 24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르는 ‘러브’는 요양원 노인들의 사랑 노래다. 촉망받는 아이슬랜드 연출가 기슬리 가다슨의 작품으로 내년 5월엔 웨스트엔드서도 공연된다.

지난 3일과 11일 두번의 오디션을 거쳐 일반인 배우 스물세명을 뽑았다.

이들은 김진태, 전양자, 이주실 등 유명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선다.

배우 이주실은 “의욕들이 어찌나 대단한지 모른다”며 “기회만 있었다면 나보다 더 유명한 배우가 됐을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웠다.
꿈도 사연도 가지가지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뮤지컬 무대를 밟게 된 이들의 사연을 들어보자.

■이윤영(76·남)

자, 지금부터 내 이야길 해볼까. 난 ‘러브’ 배우들 중 나이가 제일 많아. 그 덕에 최고령 배우니 어쩌니 하면서 다들 관심을 갖지.

원래 직업을 얘기해주면 깜짝 놀랄걸. 난 도둑잡는 형사였거든.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돌아와선 주욱 형사 생활을 했어. 무척 고되었지. 그런데 정년 퇴임 후엔 갑자기 한가해진거야.

친구라도 사귈까 해서 노인 대상 연극 교실에 갔다 여기까지 왔어. 우리 연극 교실에선 16명이 지원했는데 그 중 다섯명만 합격했어. 내가 연극 교실 회장을 맡고 있는데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멋진 작품 만들어야지. 안그래?

■윤이남(62·여)

아유, 꼬부랑 할머니가 무대에 서는 것도 모자라 인터뷰까지 하게 되네. 난 이윤영 할아버지랑 연극 교실 동기지. 어릴 때엔 간호사가 꿈이었는데 영 다른 길을 왔네.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거 같아.

연극교실에선 ‘마이 웨이’란 작품을 했는데 다들 이 오디션을 추천하더라구. 내 생각엔 특별한 재주는 없지만 두루두루 열심히 한게 예쁘게 보인것 같아.

우리 딸과 며느리가 모두 음악을 전공해서 도움을 많이 줘. 아침마다 ‘어머니 잘하세요’란 말을 들으니 어찌나 힘이 나나 몰라. 우리 손주, 손녀도 자기 친구들에게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어.

■박혜란(58세·여)

이래뵈도 내가 대학 땐 그룹사운드 보컬로 활약했어. 전성기 땐 팬이 정말 많았지. 그런데 결혼하면서 그만뒀어. 자식 키우고 살림하는 재미도 컸거든. 그렇게 시간이 가나보다 했는데 오히려 남편이랑 딸이 성화인거야. 내 재능이 너무 아깝다고.

솔직히 자신이 없었어. 마이크도 무대도 이젠 남의 이야기 같거든. 그런데 우리 딸이 오디션 공고도 알려주고 원서도 접수해주더라구. 오디션 장에도 끌려오다시피 했지.

지금도 ‘잘 할수 있을까’란 생각에 두려운데 한편으론 보란듯이 해내고 싶어. 이 박혜란 아직 죽지 않았단걸 보여주고 싶다구.

■박영옥(56세·여)

나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뮤지컬 ‘대장금’에 제일 나이 많은 상궁으로 나왔었는데. 무대는 나에게 낯선 곳이 아냐. 1974년부터 10년간 국립가무단에서 활동했거든.그런데 그 생활도 오래 하니까 회의가 들더라구. 배경처럼 뒤에서 춤만 추는 생활인데다 그땐 지금처럼 배우들이 대접받는 시대도 아니었으니.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는데 꼭 지난해부터 무대에 서고 싶은 병이 도진거지. ‘대장금’ 오디션에 갔더니 1300명이 와있어서 깜짝 놀랬어. 시대가 정말 많이 바뀐거 같아. 배우가 대접받는 시대가 온거야.

암만생각해도 ‘러브’는 나를 위한 작품같아. 오디션에 붙은 순간부터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됐거든.

■김삼배(53·여) 육춘원씨(52·여)

우린 초등학생때부터 단짝이었지. 중·고등학교 때도 우린 언제나 붙어다녔어.

결혼을 한 뒤엔 오페라랑 뮤지컬 등 공연을 보러다녔어. 그리고 그때마다 우린 ‘우리가 저 무대에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너무 젊은게 흠이더라구. 오디션 자격이 55세 이상이니까. 눈물 쏙 빠지게 연습해서라도 노인 연기를 해내겠다고 큰 소리 쳤는데 그게 먹혔나봐.

오디션을 보는 날 간절히 기도했어. 둘 중에 한명이라도 떨어지면 둘 다 하지 않겠다구. 아침마다 가장 친한 친구와 연습장에 오는 기분 누가 알까? 쉰이 넘어 이렇게 의욕에 찰 수 있다는건 행운이야, 행운!

/wild@fnnews.com박하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