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 백열등전구 아래 밤을 새며 첫사랑에 편지를 쓰던 만년필. 가격이 비싸서 항상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소중한 사람에게 편지나 크리스마스 카드를 쓸때면 사람들은 만년필을 사용했다. 날렵하게 빠진 외관 덕에 자랑스럽게 상의 주머니에 꼽고 다니던 만년필은 당시의 감정에 따라 굵고 힘있는 필체를 뿜어내기도 하고, 가늘고 여린 필체를 구현해주기도 한다. 만년필을 사용해본 사람이라면 그 손맛과 느낌이 자연스레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필통이나 서랍에 여러 필기구들과 함께 섞여 있어도 항상 빛을 발하며 손길을 유혹하는 만년필.
만년필은 그윽한 ‘감성’을 품고 있다. 만년필에 걸쭉한 잉크를 가득 넣을 때면 마치 수혈을 받는 것 처럼, 그 시절 시린 가슴이 해갈되곤 했다.
만년필은 자신만의 ‘개성’을 담고 있다. 만년필은 한달가량 사용하면 사용자의 필기습관에 맞춰 펜촉이 적당히 마모되고 적당히 기울어진다. 이때문에 같은 만년필이라도 사용자에 따라 필기감은 천차만별 달라지게 된다. 만년필은 자신만의 필기구로, 나아가 자신의 ‘분신’으로 체화되기 마련이다. 볼펜이나 사인펜은 친구들에게 빌려줘도 만년필은 결코 빌려줄 수 없는 이유다.
만년필은 그 자체로 ‘소중함’ 역시 간직하고 있다.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할때, 소중한 사람에게 편지를 쓸 때 만년필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만년필로 적어진 편지라도 받노라면 느낌이 각별하다. 한때 졸업, 입학선물로도 만년필은 최고의 가치를 지녔었다. 자신이 사용하던 만년필을 선물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볼펜과 샤프펜슬의 편리함에 만년필은 서서히 밀려났고, 컴퓨터가 상용화되면서 만년필은 세상사람들의 추억에 묻히는 듯 했다. 21세기, 시인들조차도 워드프로세스로 시를 쓰는 세상이다. 만년필은 고색창연(古色蒼然)한 필기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디지털세상에 잊혀져있던 만년필이 그윽한 감성을 앞세워 다시금 부활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유명한 파카75 마니아로 알려져 있다. 파카75는 화려하지도 않고, 고가제품도 아니었지만 당시 최고의 만년필로 꼽히던 아이템이었다. 박 전대통령은 파카75를 애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사용하던 파카75를 선물했다. 그 선물을 받은 사람중 한명이 삼성그룹 고 이병철회장이었다.
선물을 받은 이병철회장 역시 만년필 마니아가 된다. 이병철회장은 파카 뿐만 아니라 몽블랑제품도 상당히 애호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고인의 만년필사랑은 이건희 현 삼성그룹회장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초엔 삼성전자 윤종용 부회장이 신임 임원 100여 명에게 몽블랑 만년필을 선물하기도 했다.
하나은행에는 전 행장이 신임 행장에게 몽블랑 만년필을 물려주는 전통이 있다. 윤병철 초대 행장이 중요한 서류에 서명할 때 사용한 만년필을 1997년 김승유 전 행장에게 물려주었고, 김 전 행장도 2005년 3월 김종열 현 행장에게 물려줬다.
이밖에도 경제계 유명인사들 가운데 만년필애호가는 많다. 지금은 고인이 된 금호그룹 박성용 전 회장은 몽블랑 마니아였다. 그는 거의 모든 몽블랑 한정판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박전회장은 지난 2004년 몽블랑 본사로부터 '몽블랑 문화상'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교보그룹 신창재회장은 워터맨 제품 마니아로 알려져 있다. 교보그룹은 현재 오로라 만년필을 수입·판매하고 있기도 하다. 한화그룹 김승연회장도 몽블랑 만년필을 상당히 즐겨쓴다고 한다.
■시장규모, 저변 급속히 팽창중
이들 유명인사들처럼 성공한 남성들과 소수 마니아층에 국한된 채, 그 명맥을 이어오던 만년필시장은 최근 그 저변이 급속히 팽창되고 있다. 20년 넘게 만년필 유통업체에 종사해오고 있는 펜갤러리아(www.pengalleria.com)의 윤재구 대표이사는 국내 만년필시장의 규모를 900억원선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2000년대 들어서 만년필업체들의 매출이 7∼10%가량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몽블랑과 파카가 주도했던 1990년대와는 달리 펠리컨, 크로스, 워터맨, 파버카스텔 등 세계 유명브랜드들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국내 만년필시장의 파이가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는 평가다.
파카와 워터맨을 수입·유통하고 있는 ㈜항소(恒笑)의 송하철 대표이사는 "국내 소비자들의 만년필에 대한 관심이 피부로 느껴질 만큼 빠르게 달궈지고 있다"며 "향후 우리 주위에서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때가 조만간 찾아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만년필산업의 장밋빛 전망은 수요층이 광범위하게 퍼져가는 현상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국내 대표적인 만년필카페인 '펜후드'(cafe.daum.net/montblanc)의 경우 젊은 층을 중심으로 회원이 매달 100여명씩 늘어나고 있다. 지금은 회원수가 6500명에 이른다. 회원에는 40대 이상의 중장년층도 있지만 주로 20∼30대 젊은이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펜후드회장인 박종진씨는 "젊은 친구들이 자신의 개성을 살리기 위해 만년필을 많이 찾는다"며 "까페회원에는 여성층은 물론 중·고등학생들도 상당히 많다"고 설명했다.
■업체들 프로모션 등 마케팅 활발
각 브랜드별로 이같은 만년필 저변확대에 부응하기 위해 다양한 제품들을 출시하고 있으며 젊은층을 붙잡기 위한 각종 프로모션행사들을 벌이고 있다. 새로운 수요층이 생겨났다는 점에서 그동안 보수적인 활동을 펼쳐오던 만년필업체들이 기꺼이 자원을 투자하고 있는 셈이다.
파카는 젊은 비즈니스맨과 학생층을 겨냥해 '파카 소네트 복 컬렉션'을 내놓았다. 알파벳을 쓸 때 손목과 펜의 각도가 한글을 쓸때와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 한글에 걸맞는 펜촉을 개발한 것. 사각형 만년필로 유명한 워터맨 익셉션은 젊은층을 겨냥해 에메랄드 그린과 루비 레드 등의 컬러를 살린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워터맨은 지난해 철저히 여성층을 타깃으로 한 만년필 '오다스 2006 컬렉션' 시리즈를 내놓기도 했다.
또한 펠리컨, 크로스, 파버카스텔 등도 와인행사나 젊은층들의 세미나 협찬, 카레이싱대회 협찬, 다이어리나 잉크 등의 사은품 증정 같은 마케팅활동을 활발히 벌여나가고 있다.
이와 함께 문구 유통업체인 ㈜알파의 남대문 본점은 만년필 브랜드?인 '펜크로'를 이번달 오픈했다. 몽블랑, 펠라칸, 세일러, 라미, 파카, 워터맨, 쉐퍼, 피에르가르뎅, 스위스 밀리터리 등 주요 만년필을 취급하고 있다. 반응은 즉시 나타나 고객 수가 현저하게 늘어났으며 매출도 30%이상 상승하는 효과를 누리고 있다.
알파의 고해석팀장은 "만년필을 찾는 고객들이 부쩍 늘어 펜크로를 오픈하게 됐다"며 "성인은 물론 중·고등학생 손님들까지 내점하고 있다"며 만년필열기를 설명했다.
/yscho@fnnews.com 조용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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