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브로드웨이 초연이 1972년이니까 올해로 36년째다. 초창기에 남자 주인공 대니 역을 리처드 기어, 패트릭 스웨이지, 존 트라볼타 같은 배우들이 맡았다. 지금은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의 아저씨들이지만 당시엔 청춘 스타들이었다. ‘그리스(Grease)’의 연륜을 알만하다.
국내에선 5년째 공연 중이다.
‘그리스’를 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덜 재미있게 사회·문화적으로 접근해 보자. 줄거리는 ‘T-버드’라는 남학생 날라리들과 ‘핑크 레이디’라는 여학생 날라리들 간에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이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학기를 맞은 학교에 이질적인 여학생 샌디가 나타난다. 늘 치마를 입고 구두를 신고 다니는 모범생이다. 기름 바른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는 게 특기인 끈적한 남학생 대니의 정체를 모른 채 그를 좋아한다. 우여곡절 끝에 샌디는 아래 위 까만 가죽 옷을 걸치고 “네가 원하는 건 너야(You are the one that I want)’라고 외치는 ‘핑크 레이디’로 변신한다. 여자가 남자를 선택하는 1970년대 미국판 신세대의 모습이다.
한편 ‘핑크 레이디’파의 리더 리조는 학교를 몇 년 꿇은 ‘T-버드’파 케니키와 불장난 끝에 임신한다. 리조는 연유를 따지려는 케니키에게 “너 아냐”라고 잘라말한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끊으라는 식이다. 샌디도 그렇고 리조도 그렇고 1960년대 초부터 미국을 달군 여성운동과 맥락이 닿아 있다. 철없는 10대들이 마냥 찧고 까부는 것으로 일관했다면 ‘그리스’의 생명력이 이렇게 길게 이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 재미있게 보고 싶다면 10대들의 발랄한 춤과 노래를 신나게 즐기기만 하면 된다. ‘그리스’는 세미 댄스 뮤지컬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큼 볼만한 춤이 많다. 특히 댄스 페스티벌의 군무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댄스 파티 장면을 연상시킨다. 늘 느끼는 거지만 뮤지컬은 역동적인 군무가 있어야 힘이 넘친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뷰티풀 게임’에서도 적대적인 두 축구팀 간의 군무가 볼만했다. ‘그리스’의 생명력 역시 노래보다는 춤에 있는 듯하다.
대니 역이 트리플 캐스팅이고 케니키 역이 더블 캐스팅이라 일률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노래는 좀 아쉽게 들린다. 여자 출연자들은 괜찮은데 남자들은 좀 힘겹게 넘어간다. 다만 샌디 역의 임혜영과 리조 역의 홍미옥은 돋보였다. 특히 홍미옥은 노래에 감정을 실어 건조하지 않게 부를 줄 아는 배우다. 노래가 좋으면 눈과 귀가 그리로 쏠려 무대 장악력이 높아진다. 마티 역의 조선명은 연기든 노래든 춤이든 감초 역할을 잘했다. 2월17일까지 서울 코엑스 오디토리움 대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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