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준칼럼] 성역과 김연아,아사다 마오/박희준 논설위원

박희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8.02.19 17:32

수정 2014.11.07 12:39



18일자 한 조간 신문에는 이명박 당선인과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의 사진이 나란히 오른 적이 있다. 한나라당에서 한 솥밥을 먹었던 두 사람이고 다른 사람의 얼굴을 웃음 짓게 한다는 초승달 눈을 가진 두 사람이지만 표정은 전혀 달랐다.

이 당선인의 눈에는 강한 의지가, 입을 다문 손 대표의 눈에는 가히 독기라 할 만한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사진을 찍은 장소나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달랐지만 서로에 대한 두 사람의 처지를 이보다 잘 표현하고 편집한 사진이 있을까 싶었다.

사실 이 당선인과 손 대표는 정부조직개편안을 놓고 그동안 칼끝 대치를 해왔다. 이 당선인은 ‘작은 정부 큰 시장’을 기치로, 부처 통폐합을 통한 작은 정부를 위한 조직개편을 추진해온 반면, 손 대표는 이를 거부해 왔다.
특히 손 대표는 “미래전략 차원에서 해양부를 꼭 지키겠다”며 해양부 존속을 위해 앞장서기도 했다.

선거에서 이긴 장수가 패장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꼴의 협상 끝에 새 정부 출범 1주일을 앞둔 18일 밤 이 당선인은 현 정부 직제대로 13명의 장관과 2명의 국무위원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손 대표가 목을 맨 해양수산부 장관 등은 발표하지 않았다.

이 당선인의 정부조직개편안에 강하게 반대해왔던 통합민주당은 이번 발표를 ‘총성 없는 쿠데타’로 규정하면서 인사청문회에서 들러리를 서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당선인이 장관 없이 취임을 해야 할 것이라는 우려는 현실화될 공산이 크다. 새 장관들은 인사청문회가 제대로 된다고 해도 3월 10일, 차질을 빚으면 3월 20일에야 취임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동안에는 장관 없이 나라가 운영될 수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심판으로 2개월간 업무가 정지됨으로써 초래됐던 국정 공백과 혼란이 재연되는 것이다. 그때는 최고 지도자가 없었고 지금은 그의 지휘를 받는 의사결정권자 자리가 비게 된다는 차이뿐이다. 그리고 이런 국정 공백의 피해는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는 점에서 분노를 낳고 있다. 해양이든 복지든 정부가 수요자인 국민을 위해 그 기능을 수행하면 그만이지 그게 어느 부처에 있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성난 민심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리를 보전한 공직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반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또한 알아야 한다. 최근 만난 한 장관의 말은 통합민주당이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정부조직개편 협상과 관련해 “통일이 우리사회에서 공론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되는 성역이 됨으로써 건전한 통일 논의가 진전되지 못했다”면서 “다른 부처 또한 성역이 돼서는 곤란하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이미 은퇴한 다른 장관의 말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그는 “해양수산부는 성격상 경제부처이지만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고 그런 역량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먼 옛날 이야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공자는 정치 지도자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일반 백성인 소인의 덕은 풀이라 했다. 풀 위에 바람이 불듯 정치 지도자들이 모범을 보이면 풀은 모두 눕는다고 공자는 설파했지만 살벌하고도 끝장을 보고 마는 우리의 대치정국 속에서 ‘초상지풍(草上之風)’이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 피겨스케이팅 선수인 김연아양의 지난해 12월 20일자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사진이 더욱 더 큰 감동을 낳는다. 18세 동갑내기 라이벌인 일본의 아사다 마오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세 장이 그것으로 ‘숙적’이 아니라 마치 친한 단짝과 찍은 사진과 같다.
이심전심일까. 아사다 마오도 12일 국제빙상경기연맹(ISU) 4대륙 피겨선수권대회 출전을 위해 인천공항으로 입국하면서 “라이벌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전혀 기분 나쁘지 않다. 함께 열심히 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면서 “빨리 회복해 좋은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고 화답하기도 했다.
나이든 어른보다 이들의 생각이나 처신이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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