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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은의 마음의 감기를 치유하는 명화] <26> 호들러 ‘착한 사마리아인’

노정용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8.03.06 14:14

수정 2014.11.07 11:43



■삶이 고단하시죠? 그래도 먼저 이웃과 소통하세요

지하철을 타고 서있는데 옆자리에서 승객 두 사람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거기서 2호선을 갈아타고 죽 가면….” “스무 정거장도 넘겠네.” 듣자하니 둘은 노선을 잘못 정해 몇 정거장 되지 않는 길을 몇 배나 빙 돌아가려는 것 같았다. ‘그 길이 아닌데요’ 하면서 끼어들기도 오지랖 넓은 것 같아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신경이 좀 쓰였다. 알면서도 모른 체 하고 있는 게 조금은 양심에 걸렸기 때문이다.

어디서 들은 적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언뜻 떠올랐다. 유럽의 몇몇 국가에서는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충분히 구해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냥 지나치면, 죽음의 가능성을 알고도 방치했으므로 죄가 있다고 본다.
물론 응급 상황에 관련된 법이라 지금처럼 사소한 방관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말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본래 신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호들러가 그린 ‘착한 사마리아인’도 성서의 내용에서 제목을 따온 것이다. 스위스의 상징주의 화가였던 호들러는 늙음과 좌절, 병환과 죽음 등 삶이 지닌 고달픈 측면의 모습들을 자주 그렸다. 이 그림은 강도에게 몽땅 빼앗기고 벌거벗겨진 상태로 의식을 잃은 한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이 물을 먹이는 진지한 순간을 담은 것이다.

앞서 행인들은 “내가 곧 사람을 보내리다” “지금은 급하여 그냥 가고, 반드시 돌아오겠소” 하는 핑계들을 대고는 모두 피하듯 지나쳐버렸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이, 그것도 평소에 유대인으로부터 철저하게 멸시 당하던 사마리아인만이 적대감을 넘어서서 참다운 인간애를 실천한 것이다.

남의 일에 개입되기를 겁내는 이유는 그로 인해 무슨 귀찮은 책임을 물게 되지 않을지 걱정이 앞서서이다. 의협심 있게 도와준 사람이 난데없이 가해자로 오인 받는가 하면, 간혹 행인의 서투른 응급처치로 인해 더 불행한 결과가 초래되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시작된 일일지라도 어떻게 풀릴지는 통 예측할 수가 없다.

영화 ‘바벨’(2007)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일본인이 모로코에 갔다가 자신에게 고맙게 해준 현지인에게 기념으로 사냥총을 주고 돌아온다. 그런데 감사와 우정의 뜻으로 주고받은 그 총으로 인해 치명적인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일본인에게서 받은 총은 모로코의 철없는 두 소년의 장난감으로 변하게 되고, 실수로 날아간 총 한 발에 마침 모로코에 여행을 온 미국인 여자가 다치게 된다. 각각 떨어진 장소에서 개별적으로 벌어진 사건들은 알고 보면 모두 하나로 연결된다. 하나이던 언어가 소통할 수 없는 여러 말들로 산산이 흩어져버린 바벨탑의 전설처럼 영화 ‘바벨’은 소통이 도무지 불가능해져버린 세상을 묘사한다. 총을 맞은 여자의 남편은 아내를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미국대사관 측에 긴급연락을 취한다. 하지만, 미국대사관은 이 단순한 사건을 국가적 테러로 확대해석하고는 야단법석을 떠느라 정작 서둘러야 할 인명 구조에는 늑장을 부린다.

정말로 중요한 말을 해도 상대방이 곧이곧대로 듣지 않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실수로 총을 쏜 모로코 소년의 경우는 아예 말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테러사건이라는 연락을 받고 출동한 특수요원은 소년에게 자수할 기회도 주지 않고 무조건 위험인물로 취급해버렸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는 언어소통에 있어 실제적인 장애를 가진 벙어리 소녀도 등장한다. 하지만 그 소녀가 소통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벙어리 때문이 아님이 끝 무렵에 밝혀진다. 엄마의 자살을 목격한 충격으로 소녀는 아무하고도 마음을 터놓을 수 없는 상처 입은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마음을 터놓는 것, 이것이야말로 서로 통하는 세상에 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바벨탑 이전의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이기도 하다. 본래 하나이던 언어는 입으로 발화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고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말을 빌지 않아도 서로 마음이 오가는 것이다. 그런 언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그림이 있다. 랭글리가 그린 ‘저녁이 가면 아침이 오지만, 가슴은 무너지는 구나’를 소개한다.

랭글리는 햇빛이 좋은 뉴린이라는 외딴 어촌을 찾아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 곳에 몇 년간 머물렀던 영국의 외광주의(外光主義) 화가였다. 그 곳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바다를 경치로서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애환이 얽혀있는 곳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랭글리가 그린 바다에는 쓸쓸하고 애잔한 감정이 어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그림 속에서도 바다는 모질게도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가 버린 모양이다. 어제 아침 바다로 간 배는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데, 또다시 아침이 오려 하고 있다. 해는 언제 폭풍이 있었냐는 듯 바다 위로 천천히, 변함없이 찬란한 모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분명 어제의 태양과 오늘의 것은 같지 않건만….

울고 있는 여인의 등을 토닥여주는 노부가 보인다. 노부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있어 줄 사람, 슬픔이라는 짐을 나누어 들어줄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때로 세상의 일은 심장 하나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겁다. 노부는 연륜이 묻어있는 마디 굵은 손으로 흐느끼는 여인의 등을 쓸어준다.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그 따뜻한 손길에 여인은 꾹 참았던 설움이 북받쳐 올라와서 목이 멘다. 하염없이 눈물이 솟아나온다.


하루 종일 주워 담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말들을 내뱉고 또 듣지만, 그 말들이 허공을 빙빙 맴돌고 있을 때가 많다. 사람들끼리 말은 하면서도 마음은 내어주지 않기 때문에 자꾸만 사는 게 등이 시리다고들 하는 것이다.
등이 시리다고 말하기 전에 스스로 한 번쯤 반성해 볼 일이다. 편견이나 원칙이 사람보다 앞서 있지는 않은지, 의심이나 이기심이 소통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myjoolee@yahoo.co.kr

■사진설명=페르디낭 호들러, '착한 사마리아인', 1883, 캔버스에 유채, 44x50㎝, 취리히 미술관(위쪽작품) 월터 랭글리, '저녁이 가면 아침이 오지만, 가슴은 무너지는 구나', 1894, 캔버스에 유채, 64x88㎝, 버밍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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