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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공연 포스터의 세계

박하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8.03.06 22:15

수정 2014.11.07 11:40

자, 여길 보세요.

어딜 봐야 할지 모르시겠다구요? 아이 참, 그냥 아무 곳이나 보시면 되요. 눈 돌리는 곳마다 저희가 있을테니까요.

참, 인사가 늦었네요. 안녕하세요?

저희들은 공연 포스터입니다. 사는 곳은 대학로구요.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전동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지겨울 정도로 저희와 마주치실거에요. 얼핏 보아 마구잡이로 붙여 놓은 것 같죠?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엄격한 규칙이 있답니다.

그럴 수밖에요, 일주일에 80여편의 공연이 올라가는 이 대학로에서 그만한 질서조차 없다면 거리는 완전히 엉망이 될 거에요.

게시물 한 장 붙일 때마다 돈을 내야 하는 건 물론이고 크기도 정확하게 지켜야해요. 간혹 덩치 큰 친구들이 나타나면 무서운 아저씨들이 끌고가서 다이어트를 시킨답니다. 날카로운 칼로 가로 세로 붙은 군살을 덜어내는 거죠. 중요한 내용이 잘려나갔다며 울먹이는 친구들도 여럿 봤어요.

돈이 많다고 유리한 것도 아니에요. 매달 추첨을 통해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준답니다. 부지런하거나 운이 좋으면 미래의 관객들과 더 자주 만날수 있단 얘기죠.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고 모두 끝나는 게 아니에요. 약속한 날짜를 기억해뒀다 제때 수거하는 것도 잊으면 안되요. 사소해보이지만 다른 작품들을 위해 꼭 지켜야 할 에티켓이고 상도덕이랍니다.

그런데 이 모든 규칙을 무시하는 무법자들도 있어요. 길거리에서 소매를 잡아끌며 ‘싸게 해줄테니 00 콘서트 보러오라’고 말하는 사람들 보신적 있을거에요. 원칙적으로 이런 호객 행위는 불법이에요. 경범죄에 해당하지만 일일이 적발해서 처벌하기가 힘드니 그냥 내버려두는 거죠.

오늘 전 이런 무법자들과는 달리 규칙을 잘 지키는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거에요.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요?
■2주에 한번 가슴 떨리는 추첨

대학로에서 가장 주목받는 건 뭐니 뭐니해도 현수막 형님이에요. 덩치가 크기 때문에 눈에 잘 띄거든요. 공연 관계자들이 좋아하는 현수막 거치대는 1번, 2번, 3번 이렇게 세개죠. 거치대 하나마다 다섯개의 현수막을 걸 수 있으니 열다섯개의 공연에 기회가 주어진답니다.
그 중에서도 서울대 병원 앞에 있는 1번과 먹자골목 초입 2번의 인기는 폭발적이에요. 혜화로터리 쪽에 있는 3번 거치대도 나쁘진 않지만 1,2 번에 비하면 인기가 덜하죠.

현수막을 걸려면 일단 종로구청에 가야합니다. 한달에 두번 수요일 오후 1시에 이곳 식당에서 추첨을 하거든요. 적게는 50명 내외에서부터 많게는 100명 이상 경쟁을 합니다. 한 공연이 두 곳을 선택해 한번만 베팅할 수 있게 돼있어요. "연극 '줄리에게 박수를' 1번, 2번이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에요. 그렇게 한 명씩 접수를 한 뒤엔 중앙에 모여서 컴퓨터 추첨 결과를 기다리지요.

행운의 주인공이 발표되자마자 희비가 엇갈려요. 낮 1시 50분부터 접수를 시작해서 2시 15분이면 결과가 나오니 30분도 채 안걸린답니다. 떨어진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겠지만 보름후를 다시 기약할 수 밖에 없죠, 뭐. 한 번 당첨된 공연은 연달아 응모할 수 없는 게 작은 위안이랄까요.

참, 아직 끝난 게 아니군요. 당첨자들끼리 위치를 교환하는 순서가 남았어요.

'에이,3번이랑 1번을 바꾸는 바보가 어딨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런 경우가 종종 있어요. 혜화 로터리쪽에서 공연하는 작품들은 근처에 현수막을 걸고 싶어하거든요. 그 탓에 3번을 뽑은 당첨자들은 '혹시 1번이나 2번중에 바꾸자고 제안하는 사람이 없을까' 하고 두리번 대면서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답니다.

이렇게 당첨되면 3만140원을 내고 2주 동안 현수막을 걸어요. 하루 자릿세로 따지면 2150원쯤 되겠네요.

■가로등도 그냥 놔둘 수 없어

그럼 이번엔 대학로 광고물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친구를 소개할게요. 바로 가로등입니다.

다른 동네에선 어둠을 쫓는 역할만 해온 이 친구가 대학로에 와선 정말 바빠졌어요. 원통 모양의 허리띠를 차고 머리엔 깃발을 꽂았죠. 허리띠의 이름은 '가로등주 원형 게시판'이고 깃발의 이름은 '가로등 배너'에요.

한가지 재미있는 건 허리띠와 깃발의 주인이 다르다는 거죠.

가로등주 원형게시판은 사단법인 전국 소공연장 연합회란 곳에서 관리를 해요. 온라인 까페에서 신청을 받는데 공연마다 최대 아홉개의 포스터를 붙일 수 있어요.

하루 게시하는데 드는 비용은 6000원, 포스터 한 장마다 600원이 조금 넘는 방세를 내는거죠. 가로등 하나에 아홉개의 포스터를 붙일 수 있구요. 겉에 투명 보호막이 씌워져 있어 눈과 비에 끄덕없는 게 장점이랍니다.

한편 가로등 배너의 주인은 종로구청이에요. 가로등 하나에 두개의 깃발이 달려있는 모양이에요. 한쌍의 깃발을 '조'라고 부르는데 한 조당 4만원을 내야한답니다. 하지만 최소 40조 이상을 게시해야한다니 80만원은 손에 쥐고 있어야 하겠죠? 이 가로등 배너는 바람 부는 날에 특히 볼 만 하답니다.
가로수를 따라 나부끼는 수십개의 배너를 보고 있자면 꼭 만국기가 휘날리는 운동회날 같아요. 축제 분위기도 물씬 나구요.

■문화게시판과 음식점 공짜 광고

현수막이나 가로등 광고가 내키지 않는다면 문화게시판을 이용하는게 좋아요. 행인들 시선 끌기엔 게시판만한게 어디 있나요.

문화게시판은 원래 종로구청 시설이지만 지금은 서울연극협회가 맡아서 관리를 한답니다. 매월 1일 홈페이지에서 신청을 받는데 공연마다 열 곳의 게시판을 쓸 수 있어요. 방세는 600원, 일주일 간 열 곳에 게시한다 치면 4만 2000원이 드는거에요.

포스터 한장 붙이는데도 돈이 드는 대학로 인심이 야박하게 느껴지신다면 이 방법을 써보세요. 골목 구석 구석마다 사람이 몰리는 음식점을 찾아가 주인 어르신께 포스터를 붙이게 해달라고 부탁하는거에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되 볼만한 공연이라는 점을 또박 또박 설명드리는게 포인트죠.

규모가 큰 프랜차이즈 음식점들은 돈이나 티켓을 받고 대형 광고를 걸어주기도 하지만 어지간한 식당이나 주점들은 돈을 받지 않아요. 때론 '미관을 해친다'며 매몰차게 거절하는 주인들도 있어요.

또 어두운 분위기의 연극 포스터보다는 화려하고 밝은 분위기의 뮤지컬 포스터를 선호하는 분들도 많죠.

하지만 절대 기죽지 마세요. 작품이 괜찮으면 입소문만 듣고도 객석은 꽉 찰테니까요. 여기는 누구나 공정한 기회를 누리는 공연 1번지 대학로랍니다.


/wild@fnnews.com 박하나기자

■사진설명=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로 빠져나와 10m쯤 걷다보면 맞닥뜨리게 되는 '좋은 공연 안내소'. 공연장의 보고인 대학로를 비롯해 서울 각 지역에서 공연 중인 연극과 뮤지컬 광고물이 한자리에 어우러져 진객들에게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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