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자금세탁방지’와 금융변화/정태수 언스트앤영 어드바이저리 상무
일반 대중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자금세탁 방지제도는 현재 우리 금융기관에는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다. 금융기관들이 자금세탁 방지를 위한 절차를 업무와 전산시스템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시스템 구축 후 고객들이 느끼게 될 불편함과 이로 인해 영업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자금세탁이란 불법적인 수단으로 조성된 자금을 금융기관을 통해 합법적인 자금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러한 불법적인 중간 수단으로 금융기관이 오용 및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선진국의 은행에서는 고객으로부터 예금을 받는 시점부터 출납 및 각종 투자활동이 이뤄지는 모든 금융 활동에 대해 자금의 불법 여부를 체크하고 주기적인 모니터링 및 감시활동을 통해 불법자금의 유통을 차단하고 있다.
자금세탁 방지가 우리 금융시장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 살펴보자.
첫째, 은행 등 금융기관을 방문하는 고객이 과거와 같이 1∼2분 안에 주민등록증 하나로 계좌를 개설하는 일이 힘들어질 것이다. 각 금융기관은 현재에도 돈을 빌려주는 일(여신)에는 고객의 신원 및 재무상태 등의 검증을 철저히 하지만 이와 반대로 돈을 맡기는 고객(수신)에 대하여는 최근 개정된 금융실명제법에 따른 신분증의 복사 외에는 별다른 검증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고객 자산가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오가며 자문을 해왔던 것이 우리 금융의 실정이었다. 반면, 신용사회가 확립된 서구의 은행에서는 일반 출입금계좌의 개설 절차부터 고객과 관련한 여러 정보를 징구해 심사하는 등 엄격한 ‘고객확인주의 의무(Customer Due Diligence)’의 절차를 거쳐야만 계좌 개설이 가능하다. 물론 아직 서구의 선진 은행들처럼 계좌개설 업무에 수일이 소요되지는 않겠지만 현재의 1∼2분의 시간은 고객의 자금세탁 관점에서의 위험도에 따라 수십분으로 늘어나거나 요청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다.
두번째의 변화로는 금융기관에서 고객으로부터 요구하는 서류와 정보가 다양해진다는 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현재 신원확인을 위한 주민등록증 사본만 요구하는 것을 지나 거주 확인을 위한 전세계약서 사본, 전기세 영수증 등과 같은 2차 확인 서류까지 제출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이처럼 금융기관이 고객으로부터의 다양한 정보를 요구하는 이유는 9·11 테러와 같은 테러행위 또는 범죄행위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미국, 영국 등을 비롯한 서구의 주요국가들은 테러자금 유통원들과의 싸움에 있어 자금의 원천을 파악해 차단한다면 이러한 범죄를 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들은 1989년에 설립된 자금세탁방지 및 테러자금조달억제에 관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국제기구인 FATA(자금세탁방지기구·Financial Action Task Force against Money Laundering)를 통해 테러자금 조달 방지 체제를 확산시키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9년 FATA 정회원 가입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현재 이를 위해 취해야 하는 여러 업무 요건 및 절차인 ‘핵심 6대 사항:R1:자금세탁의 전제범죄, R5:고객확인주의의무, R10:기록보존의무, R13:혐의거래보고의무, SR2:테러자금조달행위의 범죄화, SR4: 테러관련 혐의거래의 보고’를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금세탁 방지의 일련의 조치는 우리 금융기관에 아무런 혜택도 없이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하는 것일까. 비록 선진국의 요구에 따라 자금세탁방지 제도가 도입되지만 이는 결국 우리 경제의 인프라를 튼튼히 하는 기초공사 비용이 된다. 다시 말해 원화 탈세가 현재 개정된 특정거래금융보고법에 의해 전제범죄로 분류돼 국가에서는 세원의 발굴이 쉽고 현금 수입을 통한 탈세가 예전보다 훨씬 어렵게 되었다. 또한 정치인을 자금세탁에 있어 주요 인물(일명 워치리스트)로 간주하기 때문에 기업의 비자금을 통한 정치 자금의 전달도 훨씬 어려워질 것이다.
오는 12월 22일이면 보다 강화된 고객확인주의의무와 관련법규를 모든 금융기관에서 시행 및 준수해야 한다. 자금세탁방지의 본격적인 도입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금융시스템이 선진국의 수준으로 될 때까지 자금세탁 방지를 위한 여러가지 조치의 강도는 조금씩 세질 것이라 예상된다. 변화는 힘들다. 하지만 구색 갖추기에 급급하게 되면 차후에 더 큰 문제로 부상할 수 있다. 자금세탁 방지를 위한 시도는 힘들고 성가신 변화가 아니라 신용사회를 구현하고 금융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이라고 생각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