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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으로 세상과 소통한지 벌써 30년”..정경연 기념展

노정용 기자
파이낸셜뉴스

‘장갑작가’로 잘 알려진 홍익대 정경연 교수(53)는 장갑을 주제로 섬유·회화·판화·조각·설치·비디오 등 미술의 여러 장르를 오가며 작업을 하는 조형예술가다. 1980년대 초 미국 로드아일랜드 스쿨오브디자인에서 섬유미술을 전공하고 귀국한 뒤 한지의 끝자락 밑 부분을 염료로 물들여 못에 걸어놓은 설치작업 ‘무제 81-8’은 한국 미술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 미술계는 전통 장르인 회화와 조각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30년 동안 오로지 장갑이란 한 소재로 독창적인 조형작업을 해온 정경연이 화업 30주년을 맞아 오는 30일까지 서울 서초동 세오갤러리(02-583-5612)에서 ‘정경연의 작가 30년 기념展’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180평에 달하는 갤러리 3개층 전관을 활용해 거대 입체작품부터 평면작업까지 작가의 30년 작업을 연대별로 감상할 수 있도록 회고전 형식으로 꾸몄다.

정경연이 ‘장갑작가’라는 별칭을 얻게 된 것은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 덕분이다. 작가가 70년대 중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을 때 어머니는 작업 시 손 보호를 위해 사용하라며 면장갑 한 박스를 소포로 보내주셨다.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소모하기보다는 간직하고픈 욕심에서 장갑으로 ‘어머니의 날’(요즘의 ‘어버이 날’)에 보낼 선물을 만들었는데 이를 본 그의 지도교수가 졸업작품에 출품하도록 권유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제게 장갑은 저의 분신이자 어머니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입니다. 장갑은 기업체의 최고경영자도, 한 나라의 대통령도, 로마 교황청의 교황도, 그리고 노동자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만인의 평등을 부르짖는 서민적인 소재라서 더욱 제 마음에 들었고 다른 사람들과 처음으로 관계하는 소통의 도구라는 점 때문에 장갑을 통해 다양한 조형 작업을 해온 것입니다.”

섬유의 씨줄과 날줄의 가장 기본 패턴을 이루고 있는 ‘평범한’ 장갑은 작가 정경연의 손에 의해 다양한 작품으로 변주되었다. 80년대 초반까지는 ‘무제(Untitled) 시리즈’로 그의 전공이었던 섬유미술을 근간으로 하는 염색기법을 활용하면서도 강렬한 컬러와 스틱으로 창출된 오브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그는 염색기법과 동서양화의 회화적 경험을 바탕으로 단색조 작업에 몰두했다. 거의 흑백만으로 작업된 검은 장갑이나 손끝만을 여백으로 남겨놓은 작업들이 그것들로 수백개의 장갑이 뒤엉켜 입체를 이루는 설치작업이 선보였다.

“세상에서 신나게 놀면 작업의 색깔이 원색에 가깝게 화려해져요. 그런데 산에서 깊은 명상을 하고 나서 작업을 하면 신기하게도 색인지, 무색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집니다.”

사실 정경연의 작업은 도를 닦는 구도자의 행위와 닮았다. 기성 제품을 가끔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장갑은 작품에 맞게 직접 디자인하고 생산라인에 주문한다. 제작과정 역시 실의 짜임이나 마감 때문에 직접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가 지금까지 사용한 장갑만도 큰 트럭 1대 분량이고 그 안에 들어간 솜은 트럭 2대 분량에 이른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블랙홀 시리즈’를 처음 선보인다. 인간의식에 의한 무한한 가능성의 열림을 안과 밖의 블랙홀로 정착시킨 작품으로 수많은 장갑을 둥글게 겹쳐서 생성의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다. 특히 이 시리즈는 장갑 패턴의 움직임으로 내부와 외부의 블랙홀로 빨려가면서 나타나게 되는 서로 다른 에너지의 울림의 양태를 보여준다는 게 예술의 전당 김미진 전시예술감독의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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