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취푸,공자의 나라를 가다

노현섭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8.10.09 21:31

수정 2014.11.05 11:37

▲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공묘 안 대성전. 중국 3대 고대 건축물의 하나다.

【특별취재팀=취푸(중국)】 “공자는 마음 속의 왕(王)입니다.”
공자의 사상은 거대한 중국 대륙을 다스리는 통치의 힘이었다. 당대의 황제들은 사상적 아버지였던 공자를 기리며 그들의 후손에까지 최대한의 예를 갖췄다. 대변혁의 한가운데 선 중국, 아직도 공자를 흠모하며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다. 공자의 고향 취푸에서 시대가 흘러도 변치 않는 공자에 대한 중국인들의 경외심을 취재했다.
〈편집자주〉

■공자에 대한 황제의 예우-공묘

▲ 공묘를 찾은 한 소녀가 공자 제단에 정성스럽게 향을 올리며 기원하고 있다.

공묘에서는 황제들의 공자에 대한 극진한 예우가 느껴진다. 공묘는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제사를 지내는 장소인 만큼 공묘에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비석들이 눈에 들어온다. 각각의 비석에는 당·명·청나라 시대를 거쳐 공묘를 증축한 과정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

특히 공묘 초입에 있는 대리석 비석은 상상의 동물로 전하는 용의 13번째 아들 비씨 동상 위에 반듯하게 올려져 있다.

이 비석에는 황제가 직접 소 300마리와 인부 200명을 동원해 공묘를 증축한 과정과 제를 올리는 과정이 상세히 적혀 있다. 당시 공묘를 증축하기 위해 사람들이 만 3년 동안 빙판길을 뚫고 자재를 날랐던 기록도 담겨 있다.

이와 함께 교문각과 그 오른편 자리에서 바로 보이는 고목은 역시 공묘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인기다. 교문각은 공묘 안에 있던 9개의 목조 건물 중 과거 수많은 지진에도 홀로 건재한 건물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교문각 오른쪽 문을 지난 자리에서 바로 보이는 고목은 공묘를 모두 13차례 찾은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가 기대어 쉬었다는 나무다.

심지어 역사에서는 강희제가 사망한 직후 나무에 신기한 용무늬가 생겼다고 전한다. 고목은 관광객들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 빛이 난다.

용무늬가 토질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는 ‘과학적인’ 분석이지만 실제 공묘를 자주 찾는 사람들에게 황제에 대한 향수는 그대로 남아 있다.

공묘에는 중국 3대 고대 건축물로 꼽히는 ‘대성전’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대성전’은 건물 자체로 보자면 과거 황제가 주로 기거하던 자금성의 ‘태화전’보다 높다.

신분에 따라 건물의 높이를 정하던 당시 상황에서 ‘태화전’보다 높은 ‘대성전’은 황제들이 공자를 대했던, 불편하지만 배움의 마음을 반영한다.

황제는 제를 지낼 때 대리석으로 기둥 10개를 아름답게 세웠다. 황제는 자기 것보다 좋은 것이 있어도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공자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다.

■하늘 아래 왕 2명이 공존하는 곳-공림

▲ 시민들이 황제의 사상적 스승이었던 공자를 기리고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공림을 찾았다.

“하늘 아래 두명의 왕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공림에서 이 말은 무용지물이 된다.

공림에는 두명의 왕이 있다. 현세의 왕과 백성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공자왕’이 바로 그들이다.

공자 묘 앞 비석에는 원나라 성종이 1307년에 내린 시호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물론 ‘왕’이란 글자를 오롯이 쓸 수는 없었다.

공자의 비석을 지키기 위해 지역 사람들은 비석의 왕(王)자 마지막 현을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후 다른 비석으로 가려 ‘왕’이 마치 ‘간(干)’처럼 보이게 했다.

공자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하는 현세 황제의 위상을 고려한 것이었다.

황제가 이 같은 사실을 모를 리 없었겠지만 역사는 황제도 굳이 확인하지 않고 멀리서 ‘왕(王)’자를 ‘간(干)’자라고 읽고 갔다고 전한다.

이처럼 ‘공림’은 현세의 황제와 백성들 마음속의 ‘공자왕’이 같은 공간에 놓이는 오묘한 곳이다.

이와 함께 공림으로 통하는 ‘주수교’를 지키는 거대한 두 석상은 공자왕의 위상을 드러내는 또 다른 예다.

‘주수교’는 인간세상과 극락세상으로 나누는 다리로 공림에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다.

이 ‘주수교’를 건너는 기둥 옆에는 ‘문관’과 ‘무관’의 모습을 한 거대한 석상이 지키고 있다.

공자의 묘 앞을 관리가 지키고 있다는 것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공자는 ‘왕’과 같은 존재였다는 의미를 갖는다.

왕처럼 모셔지는 공자가 묻힌 곳이어서 ‘공림’에 엄청난 보물이 묻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공림에는 10만여명의 공자 후손들의 유골만 묻혀 있을 뿐이다.

심지어 공자의 묘소는 벌초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잡초 속에 방치돼 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며 무덤에 겉치레를 하지 말라고 공자가 당부한 탓이다.

공자의 위상에 걸맞지 않게 초라해 보이는 이 무덤이 가지는 위력은 그 당시 황제와 현재의 중국 국민에게 깊이 남아 있다.

■중국의 변치 않는 구심점-공부

▲ 공부 안 공자 묘 앞 비석. 원나라 성종이 1307년에 내린 시호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왕’이란 글자를 오롯이 쓸 수 없어 지역 사람들이 왕(王)자 마지막 현을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후 다른 비석으로 가려 ‘왕’을 ‘간(干)’처럼 보이게 했다.

문턱이 높다. 공자의 후손들이 기거했던 ‘공부’를 방문한 첫 느낌이다.

과거 중국에서는 관직이 높을수록 집 안으로 들어가는 대문의 문턱이 높았다. 공자에 대한 황제의 예우 등에 힘입어 공자 후손들은 높은 관직을 지낸 만큼 ‘공부’의 문턱 또한 높았다. ‘공부’는 공자의 76대 후손들이 기거하던 저택과 삶의 흔적을 담고 있다.

공자와 후손들은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없어서는 안될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공자 사상과 공자의 후손들은 중국정부로부터 애절한 구애를 받고 있다.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중국정부는 공자의 후손을 중국 본토로 불러들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과거 문화혁명 시기를 피해 대만으로 이주한 공자의 76대 후손들을 본국으로 불러 사상적 통합을 이루자는 뜻으로 풀이된다.

과거 문화혁명 시기 공자와 관계된 유산은 공산주의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됐다. 사람들은 ‘지주계급 타파’를 외치며 공자사상을 배격했고 심지어 도시 전체가 사라질 뻔한 위기도 맞았다. 이 같은 혁명의 소용돌이를 피해 공자의 후손들은 대만으로 거처를 옮겼다.

올해 82번째 생일을 맞이한 공자의 76대손은 과거 문화혁명시기 시대의 소용돌이를 피해 대만으로 이주한 후 아직까지 그곳에 머무르고 있다.

이와 함께 마당에 떡하니 놓여 있는 ‘태호석’을 보면 공부에서는 ‘대접을 받는 만큼 책임도 따른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태호석’은 뇌물과 감언이설을 경계하라는 ‘공자’의 뜻이 담긴 돌이다.

높은 관직으로 인해 유혹에 빠지기 쉬운 자손들에게 뇌물을 견제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관직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는 허튼 생각을 하지 말고 자신의 입장만을 이야기하라는 뜻을 갖고 있다.

공부에 들어서자마자 ‘중광문’이란 거대한 대문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공자 집안이 황제를 맞이하기 위해 특수 제작한 대문이다.

‘중광문’은 덩샤오핑이 다른 황제들처럼 문을 통과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돌아가 유명세를 탔다. 덩샤오핑은 황제를 위한 문인 ‘중광문’을 일부러 돌아가는 것으로 국민을 향한 자신의 신념을 내비쳤다.

이 문은 지금도 닫혀 있다.

/특별취재팀=hit8129@fnnews.com

/노현섭 조은효 김명지 김학재기자

/협찬=C&그룹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First-Class경제신문 파이낸셜뉴스 구독신청하기]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