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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백화점 안의 국립도서관/윤경현 싱가포르 특파원

윤경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8.10.09 17:07

수정 2014.11.05 11:39



‘서울 명동의 롯데백화점 내에 국립도서관이 있다(?).’

귀가 솔깃해지는 얘기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다. 국립도서관의 한정된 예산으로는 엄청나게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싱가포르에서는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나라 명동에 해당하는 싱가포르의 오차드거리. 이 곳에서도 가장 유명한 백화점으로 손꼽히는 다카시마야백화점 5층에 국립도서관(분관)이 자리잡고 있다. 지난 95년 문을 열었으니 벌써 13년째다. 초기에는 쇼핑하러 왔다가 도서관에 들르는 사람이 많았으나 지금은 도서관이 중심이 됐다.
덕분에 신설 쇼핑몰들이 서로 국립도서관을 유치하려고 안달이 났을 정도다.

‘이름만 도서관이지 쇼핑에 지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휴식공간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소장하고 있는 책이 무려 20만권에 육박한다. 한 해 이 곳을 찾는 사람은 120만∼130만명을 헤아린다. 이들이 빌려간 책만 해도 2005년 87만권, 2006년에는 71만5000권에 이르렀다.

시청 인근의 싱가포르 국립도서관 본관은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유치원생에서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도서관을 가득 메운다. 특히 주말에는 가족 단위로 찾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국립도서관 회원수가 전체 인구(460만명)의 42%인 195만명이니 당연한 것일까. 취업준비생들이 열람실을 점령해 버린 우리나라의 국공립도서관과는 너무도 다른 풍경이다.

국립도서관 산하의 도서관은 모두 25개. 1개 국립도서관과 3개 지역도서관, 19개 커뮤니티도서관, 2개 어린이도서관이 있는데 ‘사람이 몰리는 곳을 찾아간다’는 원칙대로 한결같이 접근성이 뛰어나다.

이들 국립도서관이 보유한 책은 784만권(2006년 말 기준)이며 잡지 등을 포함할 경우 900만권 가까이 된다. 한 해 방문객은 대략 3800만명, 대여 건수는 2900만건에 달한다. 회원 1명이 1년에 평균 15권을 읽는 셈이다.

새로 들어오는 책은 연간 80만권 수준으로 책 구입비(정기간행물 포함)만 3400만싱가포르달러(약 290억원)를 넘는다. 중국계와 말레이계, 인도계 등 다민족국가인 만큼 책 구성도 영어 70%, 중국어 25%, 타밀어 5% 등으로 안배한다. 다만 민족 화합을 저해하는 책은 구입목록에서 제외된다.

도서관의 전반적인 시스템도 훌륭하다. 예를 들어 빌린 책은 어느 도서관에나 24시간 반납할 수 있다. 반납이 귀찮아 책 대여를 꺼리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다. 또 인터넷으로 자신이 찾는 책이 어느 도서관에 있는지 알아볼 수 있어 괜한 헛품을 팔 일도 없다.

유엔 조사에 따르면 2003년 기준 한국인의 연간 독서량은 0.8권에 그쳐 166위를 차지했다. 책을 읽는 시간은 한주에 3.1시간으로 세계 평균(6.5시간)의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 요즘 세대는 지식이 필요할 경우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접속해 검색키를 누르는 것이 첫번째 순서다.

그러나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지식은 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모든 시대의 깨달음과 지식은 책 속에 농축돼 있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은 “나는 평일에도 최소한 매일 1시간, 주말에는 3∼4시간의 독서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독서가 나의 안목을 넓혀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섭씨 30도를 웃도는 날씨에도 아파트 수영장 옆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는 외국인들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독서를 꼭 도서관에서 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문화·지식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국민이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 도서관도 국민 속으로 더 친숙하게 다가가야 한다.
소규모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의 시스템을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겠지만 배울 점은 많아 보인다.

/blue73@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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