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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네사 비크로프트 |
여성의 몸이란 무엇인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성의 몸, 생리적 존재로서의 여성의 몸, 정치적 존재로서의 여성의 몸, 문화인류학적 존재로서의 여성의 몸 등 여성의 몸을 둘러싸고 제기된 다양한 담론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재편된 문화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즉, 그 이전의 여성의 정체성은 성(gender) 고유의 관점에서 파악된 것이 아니라 다분히 남성중심의 시각에서 본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래 서구의 철학은 전통적으로 여성을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간주해왔는데, 그것은 비단 철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유한계급론을 쓴 돌스타인 베블렌에 의하면 남성들은 과시적 유한의 형태로 여성의 몸을 일종의 장식물로 취급했다. 가령 여성의 복장 가운데 몸을 조이는 코르셋이나 거들, 브레지어와 같은 속옷들은 여성의 몸을 맵시 있게 만들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남성중심사회의 산물인 것이다. 1960∼70년대 여성해방운동이 불길처럼 번지기 시작했을 때 케이트 밀레트와 같은 여성운동가들이 브레지어와 같은 여성의 몸을 옥죄는 속옷을 벗어던질 것을 주장한 이유도 이러한 남성중심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에 있었다.
바네사 비크로프트의 작품은 상반된 비평적 쟁점을 낳고 있다. 과연 그것은 여성의 몸을 성적 대상에서 해방시킨 것일까, 아니면 하나의 고급 포르노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대략 30명에서 100명에 이르는 여성들을 도열시켜 사진을 찍는 바네사 비크로포트의 퍼포먼스는 일종의 시각적 잔치다. 자원봉사자나 직업 모델을 사용하는 그녀는 참여자 전원의 옷을 벗기거나, 검은 색 부츠를 신기거나, 알몸에 가죽점퍼만을 걸치게 하여 일단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유도한다. 어디 그 뿐인가. 경우에 따라서 모델들은 음모를 밀어 성기의 적나라한 속살이 드러난 상태에서 포즈를 취함으로써, 마치 자극적인 도색잡지를 방불케 하는 장면도 있다. 바네사는 모델들을 하나의 공간에 세운다. 그녀는 모델들을 자신의 구상에 따라 배치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서 있다가 피곤하면 앉을 수도 있다. 이 무너짐의 상태야말로 바네사가 의도하는 국면이다. 인위적인 질서가 자연스럽게 흐트러지면서 자연스런 몸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남미 특유의 울창한 열대식물들로 가득 찬 이비라푸에라 공원은 상파울루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거기 잘 가꿔진 공원의 한 복판에 상파울루비엔날레가 열리는 시실로 마타라초관이 축구장 네 배 크기의 웅자를 자랑하며 서 있다.
김아타씨의 작품 설치 관계로 부산하게 그곳을 드나들던 필자는 입구에 서 있는 두 대의 봉고차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검은 색 도랑으로 분장을 한 일단의 젊은 여성들이 앉아 있었다. 어림짐작으로 헤아려 봐도 한 30명은 족히 돼 보이는 인원이었다. 스치듯이 그 장면을 보면서 처음에 나는 그들이 무엇을 하기 위한 사람들인지 몰랐다. 그저 패션모델들이 작품 사진을 촬영하는 것쯤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들이 바로 작품 촬영을 위해 바네사가 구한 현지 모델들일 줄이야!
정작 작품 촬영을 위한 퍼포먼스가 벌어진 것은 그로부터 이틀인가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마침 전시장이 쉬는 날이었는데, 그 틈을 이용하여 전시장에서 작품 촬영을 위한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있었다. 영화 촬영을 방불케 하는 현장은 모델들을 비롯하여 수십 명에 달하는 촬영 스태프와 구경꾼들로 인하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필자와 함께 3층 전시장의 난간에 기대어 사진을 촬영하는 현장을 바라보던 김아타씨는 같은 사진작가로서 그 모습이 무척이나 부럽다고 말했다. 그 때가 6년 전인데, 그도 이제 어느 덧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들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바네사 비크로포트의 작품은 현대미술에서 예민한 쟁점을 유발한다. 광고와 포르노, 그리고 순수미술 사이의 경계에 걸쳐있는 그녀의 작품은 몸의 사회적·정치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퍼포먼스가 벌어지는 장소는 G8정상회담이 열렸던 제노아의 튜칼레궁전과 같은 곳인데, 이 권위적인 공간은 백인 남성의 힘을 상징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고향 언론의 기대를 저버리고 흑인 모델들을 선택했다. 정치적으로 억압받던 나이지리아 이민자들을 위해 기꺼이 흑인들을 모델로 퍼포먼스를 벌였던 것이다.
바네사 비크로프트는 나이지리아의 흑인 유아를 모델로 성모 마리아로 분해 사진을 찍는가 하면 실제 흑인 아이를 입양하는 일을 추진해 왔다. 이 모두는 몸을 통해 인종을 초월한 사랑을 실천하려는 그녀의 의지를 보여주는 행위다. 그러나 그것을 둘러싸고 정치적 인종적 쟁점이 도출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몸의 반란, 바네사의 작품을 보면서 언뜻 떠오른 단어다.
/yoonjs053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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