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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깔모자와 황금날개] <20> 자기 자신과의 게임 ⑦

노정용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8.11.14 16:52

수정 2008.11.14 16:52



■글: 박병로 ■그림: 문재일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가 들리더니 이십대쯤 돼 보이는 여자 셋이 지나갔다. 그중 한 여자가 노이만을 보고는 흡, 하고 입을 가리며 종종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불량스럽게 입술을 일그리며 보따리를 열어젖힌 노이만이 비닐 종이에 싼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두 장과 동전 대여섯 개를 찾아냈다.

“녀석! 한참 찾았잖어.”

“…….”

노숙인이 겁먹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찾아낸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노이만이 휘파람을 불며 일어났다.

“다음에 뒤졌을 때 만 원 이상 안 갖고 있으면 너 이 녀석…. 혼날 줄 알어.”

노숙인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지 그는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날 때까지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십 미터쯤 걸어가다 필립이 뒤돌아보았다. 노숙인은 좀 전 그 자세로 망연자실 멈춰 있었다.

“선배님 이건 좀 심한 거 아닙니까?”

“더럽다는 거야? 애기 똥구멍에 걸린 콩나물이라도 빼먹은 것처럼? 피보나치 수열식으로 돈을 불려나갈려면 이보다 더한 식으로 못된 짓을 해야 할걸. 누굴 동정할 여유가 없어.”

“인간적으로 그러는 거 아니지 말입니다.”

“나한테 전에 제압당한 적이 있는 놈이야. 난 그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저 친구한테 하룻밤 신세 져봐. 제압되든가, 제압해야 할 거야.”

지하에서 땅 위까지의 짧은 거리가 필립은 아득했다. 등 뒤로 날아오는 사람들의 시선이 아프게 와서 꽂혔다. 돈이라는 관념이 있는 사람일까 싶었으나 돈을 빼앗기며 어이없어하던 표정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이. 지금 이 순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 같은데, 어때?”

땅 위로 나와 청계천 방향으로 걸어가며 노이만이 힐끔 뒤돌아보았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 난 말이야. 배부르게 먹고 독한 술에 기분이 약간 업되는 이런 때에는 꼭 섹스가 하고 싶어져. 그 점에서 의기투합하고 있으니 오늘 밤이 멋지겠어.”

“아니, 그래도 선배님. 아직 초저녁 아닙니까.”

“돈이 없냐, 희망이 없냐. 그렇다고 배짱이 없냐, 조지가 없냐. 녀석, 그지? 그 점에서 우린 어울리는 것 같다.”

노이만이 휴대폰을 꺼내더니 폴더를 열어 들여다보며 말했다.

“흐흐, 이게 뭐야. 시간도 상징적이네? 지금부터 정확히 한 시간을 주겠어. 아홉시 십팔 분까지 홍대 앞 고미술 서점 앞으로 와.”

“미션입니까?”

“당근. 함께할 파트너를 데려오는 거지.”

“선배님. 전 이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섹스가 자신이 없다는 것이야, 이 게임이 싫다는 것이야? 사내 녀석이 돼 가지고.”

필립은 얼떨떨했다. 청계천 방향으로 걷던 걸음 그대로 사라져 가는 노이만을 지켜보면서 필립은 한동안 서 있었다. 생각이 달랐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필립은 그러한 강압에 고분고분 당하는 것은 자신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노이만의 눈에 들기 위한 게임이 아니었다.
자신과의 게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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