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이대형의 ‘큐레이터 따라하기’] ③ 행복한 ‘변방의 고수’ 김동기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8.12.04 15:42

수정 2008.12.04 15:42

▲ 작가 김동기
“작가는 우물을 파는 사람입니다. 10m, 20m 파내려가다가 물이 없으면 그 옆을 팝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덩이 숫자도 많아집니다. 그리고 결국 물을 발견하게 되죠.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그 물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합니다. 성공한 인생으로 기억될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 옆에서 무식하게 한 우물 파기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30m, 50m, 100m…. 계속 파내려갑니다. 결국 나이가 들어 물을 찾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저를 보고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비웃겠지요. 그러나 저는 행복합니다. 누구보다도 우물을 더 깊고 열심히 팠기 때문입니다.” 대구 화실에서 만난 작가 김동기의 말이다.

정말로 그랬다. 매번 약속을 미룬 끝에 뒤늦게 찾아간 김동기의 화실은 깊고 거대한 구덩이처럼 감동적이었다. 문앞에 걸린 ‘손님사절’이란 커다란 글씨와 작업실 한 면에 조그많게 낙서한 ‘나는 계란으로 바위를 깰 수 있다고 믿는다’라는 문구가 결코 코믹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서도, 낡은 작업복에서도, 새로 시도한 수많은 작품 속에서도 진지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오전 9시에 1000원짜리 김밥 한두 줄 싸들고 작업실에 들어와 밤 12시까지 작업실 밖을 나가지 않는다. 일부러 손님을 불러 낭비할 시간도 없다고 한다. “화실을 떠나는 것이 두렵습니다. 열정이 식는 게 두렵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처럼, 먹이 붓을 떨날 수 없는 것처럼, 화실은 제 삶의 전부입니다. 15년 동안 오로지 한길만 걸어 왔기 때문에 아내는 저를 ‘의지의 한국인’이라고 부릅니다.”

▲ 김동기의 ‘anxious’

작가 김동기와의 첫 대면은 지난 2001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이에 그린 작품 50여점을 들고 화랑문을 노크한 한 남자가 명함을 건넸다. 무슨 무협지도 아니고 이건 뭔가. ‘변방의 고수’ 김동기. 금테 안경에 단정한 회사원 차림의 정장, 얼굴에서 한 순간도 떠나지 않는 웃음, 그리고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상냥함은 작가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세일즈맨에 가까웠다. 만일 작가라면 아마추어이겠지 싶었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작품을 보기로 했다. 예상과 달리 검은색 바탕에 거칠게 그려나간 인물이며 꽃이며 수준급의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붓은 물론이고 못과 조각칼로 그려 내려간 화면 어디에도 망설임이나 꾸밈이 없는 과감함이 놀라웠다. 어둠을 그렸지만 우울함이 배어 있지 않았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동화 같다고나 할까.

혹시 독일이나 유럽 어디에든 유학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한 번도 외국을 나가보지 않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밝고 예쁜 그림의 홍수 속에서 만난 뜻밖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지방대 출신, 그것도 인기 없을 검은색 풍경을 그리는 작가에게 관심가질 전시장은 거의 없었다. “선생님! 참 작품이 좋네요”라는 말 이외에 어떤 약속도 해주지 못했다. 정말로 서울이란 무대는 넘보기 힘든 높은 중원이었던 것일까. 그로부터 3년이 흘렀다.

2004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마련한 ‘삶의 풍경展’에서 다시 한번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참 좋네요” 정도가 아니었다. 전시장 중앙에 당당하게 걸려 있는 거대한 검은색 캔버스 작품은 이전과는 다른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밑 그림 없이 단번에 형상을 그려내는 필력은 더욱 세련되었고 검은 색 속에서 다양한 색을 발견해내는 실력은 더욱 예리해졌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3년 전과 똑같은 차림에 똑같은 금테 안경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는 얼굴까지 그대로였다. 그러니 달리 볼 수밖에 없었다. 웃음이 정치적인 제스처가 아닌 여유와 자신감 그리고 상대에 대한 배려라는 사실을 알았다.

▲ 김동기의 ‘root of hope’
그의 그림을 보고 한 관객이 말했다. “죽으려고 했는데 선생님 작품을 보니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그림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것은 슬픔을 더 큰 슬픔으로 포용하고 치유하는 숭고함이었을 것이다. 그가 3년 전에 보여줬던 모습은 한순간의 의욕이 아닌 진지한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변하지 않느냐고. 영리하게 변신을 거듭하며 처세에 능한 사람이 빛을 보는 시대에 순진함이 웬 말이냐고. 권력 앞에 고개 숙이고, 이권(利權) 앞에 송곳니를 드러내고, 시기에 눈먼 모략과 음모가 판을 치는 세상인데 너도 변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유혹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아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하지 않아서 힘을 발휘하는 게 있다. 작가 김동기가 그렇다. 세상이 변해도 한결같이 자기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의지, 성공이 아니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 자기일에 대한 순수한 열정, 그리고 사람에 대한 믿음까지…. 김동기가 지난 15년 동안 일관되게 보여준 모습이다. 변심하지 않고,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게 어렵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그가 대답했다. “저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요. 그 시간이 소중해 거기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그는 작품을 꽃에 비유한다. “중학교 시절 꽃을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달밤에도 꽃이 자라는지 살폈고, 비가 오면 꽃이 떨어질까 우산을 씌워 주었고, 더울 땐 양산을 펴 씌워 주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 역시 좋아야 하고, 쉼없는 관심을 주어야 가능합니다.”

스스로를 변방의 고수라고 칭해온 김동기에게도 무서운 것이 있다. 혹시 세상이 자신의 작품을 몰라주면 어떠할까, 라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쉽게 답을 내고 대비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기 전에 컨테이너 박스 3개를 구해 그 안에 작품을 가득 채워넣고, 50년 뒤에 하나씩 열어볼 수 있도록 열쇠를 물려줄 계획이다. 자식도 안되고 반드시 자신의 작품을 가장 아끼고 알아주는 큐레이터어야 한다 등 상속의 조건도 까다로웠다. 가장 오랫동안 계발이 안되고 이사도 안 가는 관공서가 경찰서이기 때문에 경찰서 옆에다가 컨테이너 박스를 쌓아 둘 계획이다.

보안 걱정을 안해도 된다며 이야기를 하는 내내 웃음이 가득했다. 정말로 행복한 것이 어떤건지 돌아오는 길 내내 생각하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세상이 변한다지만 변한건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세상을 탓하지 말자. 행복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milklee@gmail.com 큐레이팅 컴퍼니 Hzone 대표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