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무역입국의 그늘,밀수 밀화] ⑮ 1950년대 혼란기의 ‘마카오 신사’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9.01.06 16:55

수정 2009.01.06 16:55



1952년 임시수도였던 부산 남포동·광복동을 당시 유행의 첨단을 걷던 마카오 신사가 누비고 다녔다면 선뜻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것도 두 가지 부류의 마카오 신사가 동상이몽의 길을 걷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카오 신사란 말이 등장한 것은 해방 이후다. 1947년 3월 17일 인천항에 ‘페리오드호’란 무역선이 입항했다. 이 배는 마카오에서 생고무와 양복지, 신문용지 2000t을 싣고 들어왔는데 입항 후부터 ‘마카오’ ‘무역’ ‘마카오 신사’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홍콩이나 마카오를 오가며 무역하는 사람을 마카오 신사, 이들이 하는 무역을 마카오 무역이라고 불렀다. 마카오 신사는 초창기 이렇게 무역과 관련지어 불렸지만 1950년을 전후해서는 마카오나 홍콩 등지에서 밀수입해 온 양복지로 신사복을 지어 입은 사람을 흔히 ‘마카오 신사’라고 불렀고 멋쟁이의 대명사가 됐다.

당시 마카오 신사는 8대 특징이 있었다. 먼저 영국제 양복지로 맞춘 양복에 영국제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발에는 이탈리아제 발리 구두, 손목에는 스위스제 롤렉스 시계, 허리에는 이탈리아제 악어 가죽벨트, 손가방은 프랑스제 크리스티앙디오르 또는 루이뷔통 제품, 머리에는 필그램 파나마 모자를 슬쩍 걸친 다음 샘소나이트 여행용 트렁크를 끌어야 정통 마카오 신사가 됐다.

그러나 대부분 밀수한 영국제 양복지로 맞춘 양복에다 맥고 모자(밀짚모자)나 파나마 모자를 쓰고 스프링 코트에 조끼, 재킷, 와이셔츠, 넥타이를 맸다. 이 마카오 신사가 치장한 물품들이 정상적으로 들어온 수입물품이면 다행이겠지만 대개 홍콩이나 마카오 등지에서 선원들에 의해 밀수입된 명품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부산항은 군수물자를 실은 선박과 외국인이 수시로 드나드는 도시였다. 이런 와중에 세관직원 복장이란 것이 좀 세련되고 국제신사다운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어느 나라 없이 관문의 세관원은 그 나라의 얼굴로 다들 깔끔한 제복을 입히려 한다. 그런데 정부 수립 후부터 우리 세관원 복장은 미군이 입었던 바지를 염색한 것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세관원이라도 제복다운 제복을 입혀야겠다는 뜻에서 홍콩에서 영국제 양복지를 수입, 해군 장교복과 같이 단추가 8개 달린 양복으로 맞춰 입혔다.


그러다 보니 이걸 입은 세관원이 바로 마카오 신사가 돼버렸다. 어떤 직원은 업무에 임할 때뿐 아니라 아예 이걸 입고 출퇴근까지 했으니 정부가 공인한 마카오 신사가 부산항 주위를 활보했다고나 할까.

흥미로운 것은 이들 두 부류는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마카오 신사였지만 밀수의 경우 서로 쫓고 쫓기는 처지에 있어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밀수란 것은 항상 사회가 불안하고 어려울 때 혼란한 틈을 타 성행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지만 1950년대 우리가 가장 암울했던 시대에 가장 사치스러운 유행의 산물인 마카오 신사란 말이 세간에 등장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

■사진설명= 전형적인 마카오 신사 차림의 김구 암살범 안두희.